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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어머니는 '걸음마' 중입니다
피나얀
2006. 11. 17.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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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2006년 11월 15일(수) 오후 8:11 [오마이뉴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 제 아무리 사모곡을 부르고,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산해진미의 제상을 올려도 돌아가신 분들이 살아오실 리도, 차려진 음식을 드실 리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살아생전 소찬이나마 정성껏 마음의 밥상을 차려 올리는 것이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는 지혜일 것입니다.
백수를 한다 해도 살아갈 날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은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을 다녀오며 사모곡을 미리 불러보는 마음으로, 소찬이지만 지극한 정성으로 차려드리고 싶은 마음의 진지를 대신해 2회로 나누어 쓰는 짧은 연재 중 첫 번째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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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마치 풍파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마음을 닮은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싸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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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임윤수 |
|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엄마의 목덜미를 암팡지게 끌어안고 안기던 어릴 적 내 모습처럼 가슴에 안기며 목덜미를 끌어안는 어머니의 손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제법 무거울 거라고 생각하였던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볍고 작았습니다.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 정도, 아니 그보다도 훨씬 가벼워 어머니의 뼈가 늙어가면서 혹시 수수깡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가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낙상으로 무릎인대가 끊어져 며칠 동안 입원치료를 받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가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졌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노인들이 뒷간(화장실)에서 넘어지면 머지않아 돌아가신다는 불길한 옛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가슴부터 덜컹 내려앉았었지만 빠르게 건강을 되찾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자식이 등산을 다녀와 벗어 놓은 양말과 손수건을 주물러서 널 생각으로 욕실엘 들어갔다 슬쩍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미끄러지면서 무릎에 통증이 오긴 했지만 일상에서 있을 수 있는 부상정도려니 하고 바깥출입도 하였지만 서너 시간이 지나며 통증이 심해지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형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엄마는 우선 방사선 촬영으로 무릎 손상을 확인하였고, 좀더 구체적인 부상정도를 확인하기 위하여 방사선 전문병원으로 옮겨 MRI(자기공명단층촬영)촬영을 하였습니다. 현상된 필름을 가지고 판독한 결과 무릎에는 출혈된 피가 고여 있었고 무릎을 지탱하고 있는 4개의 인대 중 중앙에 있는 인대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호객행위를 하듯 수술만을 강요하는 병원
어머니가 처음 후송된 병원은 충주에서 성형외과 쪽으로 제법 이름이 있는 개인병원이었지만 MRI 시설은 되어 있지 않아 전문 방사선과에서 사진을 찍어 판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필름을 보여주며 부상 정도를 설명하기에 앞서 대뜸 수술부터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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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 인대가 끊어진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걸음마를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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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임윤수 | 이미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X-레이 사진을 찍었을 때, X-레이 필름만을 보고 '이거 완전 똑 끊어졌네. 수술해야겠구먼' 하며 반말을 찍찍 해댔다는 젊은 의사의 막말에 일찌감치 기분이 상해 있던 형은 굳어진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풍채가 좋은 원장이라는 사람은 수술을 하지 않으면 평생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공갈치듯 강조하며 어떤 경우든 수술을 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호객꾼이 손님을 꼬드기려 그럴싸한 말솜씨로 썰래발이를 풀듯 땀을 뻘뻘 흘려가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하려면 6시간 정도가 걸리지만 자기가 하면 2시간에 충분하다는 신속성(?)을 자랑하며 수술을 전제로 한 몇 가지를 설명합니다.
30여분 동안 장황한 말솜씨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의 설명에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부목을 대어 고정시키는 등의 응급처치를 마쳤고, 다리가 부어 있는 상태이기에 병원에 입원을 한다고 해도 밤새 링거주사를 맞는 것 외에는 별다른 치료나 처치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유달리 병원이란 곳을 증오할 만큼 싫어도 했지만 환자나 그 가족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 너무나 노골적인 표현으로 기분을 상하게 한 젊은 의사의 태도와 수술만을 강조하는 듯한 원장의 설명이 미덥지 않았기에 하룻밤의 입원조차도 기피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겁니다.
어머니가 증오(?)할 만큼 병원을 기피하는 이유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어머니는 병원을 병적으로 싫어하기도 하고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병원을 증오하고 기피까지 하는 데는 나름대로 뿌리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병원에 대한 어머니의 한은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즘의 병원들이야 좋아진 시설만큼이나 서비스 정도도 좋아져 그럴 리도, 그럴 수도 없겠지만 38년 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흰색 가운만 입으면 의사가 되었든 간호원이 되었든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군림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행세를 했던 모양입니다.
38년 전인 1968년 음력 윤 7월, 오후 늦게 먼 곳을 다녀오던 아버님이 집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서 졸지에 쓰러지셨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연락으로 아버지는 군소재지 병원으로 응급이송이 되었고, 뒤늦게 연락을 받은 집식구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경황없이 저녁 늦어서야 병월엘 찾아갔었답니다.
지금이야 동네 골목까지 찻길이 닫고, 동네마다 농촌형 트럭일지라도 자동차가 몇 대씩은 되지만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동네에서 1km쯤 떨어진 아랫마을까지 버스가 다니긴 했지만 하루에 3번이 전부였고, 아랫마을까지 가는 동네 진입로는 걸어서만 다닐 수 있는 좁은 논둑길이었습니다. 그 후에 새마을 운동으로 리어카길이 만들어지고, 다시금 농지정리로 차들이 다닐 만큼의 포장된 농로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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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인 1986년, 당신이 돌아가시면 영정으로 사용하라고 찍어 놓은 사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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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임윤수 | 그때의 그런 상태, 찻길도 없고 마지막 버스도 끊어진 상황에서 저녁 늦게 병원엘 가려면 아랫마을에 있는 댐(수력발전소)에서 운용하는 트럭('오시탱'이라고 불렀음)을 얻어 타고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그렇게 얻어 타고 갔지만 입원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다고 다시 다녀오자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왕복 60리가 넘은 밤길을 걸어서 다녀온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레 입원한 아버님은 속에서 불이 난다고 난리를 치고, 그런 환자에게 마땅하게 물 한 모금 떠다 줄 그릇조차 없는 상황이니 칠월의 짧은 밤이 어머니에게는 지겹도록 길게만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악몽처럼 지겨웠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워하고 불편해 하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어떻게 해 드리고 싶어 어머니는 베개라도 하려 간호원들에게 머리를 받칠 것 좀 달라고 하였더니 아주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주먹 하나를 얹어도 찌그러질 것 같은 종이 곽 하나를 던져주듯 주더랍니다. 갈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물이라도 떠 넣게 숟가락이라도 하나 빌려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더랍니다.
결국 어머니는 전쟁터도 아닌 병원에서 아버지의 갈증을 달래주기 위해 고무신을 닦아 물을 떠다 입술을 축여드리며 시간을 보내야 했던 모양입니다. 시골아낙으로 당차지 못해서 그런지 어머니는 결국 밤새 동동거리는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지아비를 지켜보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고, 날이 밝으며 식구들이 이것저것을 챙겨 와서야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답니다.
병원을 미워하는 어머니의 뿌리 깊은 한은 여기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밤새 목이 마르다고 아우성을 치는 아버지에게 겨우 고무신짝으로 물을 떠다 입술을 축이게 할 정도였다니 병원에 대한 불신, 간호원들에 대한 증오가 한의 뿌리로 생겨난 모양입니다.
하룻밤을 그렇게 보냈더라도 아버지가 쾌차하여 퇴원을 하셨다면 지나간 추억쯤으로 돌렸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퇴원을 하여야 했습니다. 시골병원이어서 그랬나는 모르지만 하루를 넘기기 힘드니 집으로 모셔가라는 압력을 받은 겁니다.
지병이 있긴 했지만 멀쩡하게 집을 나서 며칠 동안 여행을 다녀오던 아버지가 졸지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일인데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을 겁니다.
고무신을 닦아 지아비의 입술을 축여 주었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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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귀신같은 늙은이 뭐하려 찍으려 하느냐’며 사진 찍기를 극구 부인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주 어렵게 찍었습니다. 20년 전 찍은 사진가 비교하니 그때 만해도 어머니는 새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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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임윤수 | 어머니는 어떻게든 병원에 있으며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병원의 고압적인 퇴원강요와 객사(客死)만은 피하려 했던 시대적 배경 탓에 결국 아버지는 퇴원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버스길이 닿는 아랫동네까지는 차를 타고 왔고, 아랫동네서 집까지는 들것에 실려 논둑길을 따라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들것에 누운 아버지는 어느새 광대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몰골이었고, 좁은 논둑길을 따라 올라가는 들것 뒤로는 동네사람들이 줄지어 따르던 모습이 제 기억에도 생생합니다. 들것을 들었던 사람들이 쉬기 위해 지금은 농지정리로 뽑혀져 보이지 않는 느티나무 아래서 멈춰 섰을 때 아버지는 정말 황망한 눈빛으로 주변의 논들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 느티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아버지가 농사짓던 논이 있고, 논에서는 당신이 심어놓은 벼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으니 아버지는 벼내기 하던 봄날을 떠올리고, 수확할 수 없는 일 년 농사를 걱정하거나 허무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퇴원을 한 아버지는 결국 그날 저녁에 돌아가셨으니 병원에 대한 어머니의 한은 씻을 기회도 씻어낼 차례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어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그 악몽 같은 병원생활에 '병원하면 불친절한 곳, 정도 눈물도 없는 곳'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원과의 그런 악연이 있기에 어머니는 병원을 싫어하는 것만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에서야 또 다른 이유를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을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아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룻저녁, 지아비가 마지막 가는 그 하룻저녁조차 편안하게는커녕 타는 갈증조차 달래주질 못했는데 어찌 몸뚱이가 조금 아프다고 병원을 찾고 치료를 받느냐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가는 지아비의 마지막 생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자책감을 당신의 잘못으로, 평생의 업으로 짊어지고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어디 내 어머니만 그렇겠습니까. 세상의 어머니들이 다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감히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이 글을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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