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프랑스의 낭만적 고도 낭시

피나얀 2007. 4. 23. 19:49

 

출처-[레이디경향 2007-04-23 11:30]

 

비단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프랑스는 꼭 한 번 눈에 담고 싶은 나라다. 그중에서도 낭시는 실타래처럼 엉킨 역사이야기가 여행의 재미를 더하는 곳이다. 잘 단장된 고건축물로 둘러싸인 스타니슬라스 광장에서 마시는 커피에선 켜켜이 쌓인 유럽 역사의 향기가 전해진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무대
 
유럽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역사 깊은 도시여행이다. 실타래처럼 엉킨 역사의 무대를 되짚어보는 시간여행의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는 프랑스 동북부의 낭시(Nancy)다. 낭시라는 도시가 국내 언론에 언급된 것은 2005년 봄이다.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과 독일의 슈뢰더 총리, 폴란드의 크바니예프스키 대통령이 프랑스 동북부의 자그마한 도시 낭시에 모여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였다. 당시 이들은 EU회원국에게 유럽헌법의 지지를 호소했다.
 
파리나 베를린, 바르샤바에서 회담을 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낭시였을까. 이들이 낭시에 모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낭시는 알사스 로렌 지방의 중심 도시 중 하나다. 이쯤 되면 감이 잡히는 독자들도 계실 것이다. 알사스 로렌 지방은 바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였던 곳이니까. 독일과 프랑스, 폴란드 유럽 3국의 수반이 모인 것은 과거 치열하게 영토 분쟁을 했던 곳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한 목소리를 내고 하나가 됐다.
 
여러분도 대통합에 참여해달라”는 뜻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해가 되는데 왜 폴란드 대통령까지 거기 모였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있을 법하다. 낭시를 부흥시킨 왕은 폴란드 왕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왜 폴란드 왕 동상을 세웠을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지방 역사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낭시는 과거에는 로렌 지역의 공작이 다스렸던 곳이다. 도시 규모도 크지 않았던 지역이라 유럽 역사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곳이다.
15세기 이후 도시가 발달하자 주변국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사실 독일은 중세만 하더라도 나라라고 할 만한 정치 구조를 갖지 못했다. 수많은 영주가 나눠서 다스리는 곳이었다. 신성로마황제가 독일의 지배세력이었다. 1701년 프리드리히 1세가 독일이란 나라의 초석을 세웠다. 프리드리히 1세는 현재의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를 다스리던 영주였다.
 
그는 ‘왕’이 아니라 그저 제후였을 뿐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브란덴부르크에서 자신을 왕으로 부르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어차피 당시 브란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과거 분쟁 때마다 도움을 받았던 황제는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스스로를 프로이센 왕이라고 칭했다.
 
이후 프로이센은 슬금슬금 세력을 키웠고, 손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에 와서는 강력한 통일왕국으로 성장했다. 결국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영토 전쟁을 벌여 알사스 지방을 빼앗게 된다. 운 좋게도 로렌의 주도인 낭시까지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수많은 국경 분쟁을 거쳤던 곳이다. 낭시 관광객들이 처음 둘러보는 것은 스타니슬라스 광장이다. 광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위엄과 역사가 느껴지는 곳이다.
 
한때는 궁전이었다는 시청, 화재로 다시 지었다는 오페라하우스, 1백 년이 훨씬 넘는 레스토랑, 마리앙투아네트가 묵었다는 그랑호텔, 아르누보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광장은 이렇게 잘 단장된 로코코 양식의 고건축물로 둘러싸여 있다. 비록 파리의 콩코드 광장처럼 크고 넓지는 않지만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다. 광장 한가운데는 스타니슬라스 동상이 서있다. 스타니슬라스는 폴란드 왕이었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 사람들이 왜 폴란드 왕 동상을 세웠을까? 역사는 이렇다.
 
낭시는 로렌 지방의 수도. 18세기엔 공작 프란시스 3세가 다스리는 영지였다. 공작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면서 오스트리아 왕(프란시스 1세)으로 승격됐다. 프랑스 땅이었다가 졸지에 오스트리아 영토가 될 위기에 처한 낭시. 루이 15세의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묘한 대결 구도가 됐다. 결국 이들이 외교적 타협점을 찾은 것은 폴란드 왕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프랑스왕 루이 15세는 로렌 지방과 수도 낭시를 장인인 스타니슬라스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어부지리로 낭시의 군주가 된 스타니슬라스. 당시로선 드물게 두 번이나 폴란드 왕을 역임했으나 말년에는 돈도 없고 왕위도 내놓은 상태였다. 그가 낭시에 올 때는 인생의 황혼기인 59세였다. 루이 15세도 다 계획이 있었다. 늙은 장인이 얼마 못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고 나면 어차피 자신의 차지일 텐데 무슨 걱정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루이 15세보다 더 오래 살았다. 89세 때 담뱃불이 옷에 떨어져 불이 붙는 어이없는 사고로 죽을 때까지 장수했다.
 
스타니슬라스 광장에서 시작된 낭시의 부흥
 
스타니슬라스는 실권이 없는 왕이었다. 군사·정치 문제는 간여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 루이 15세가 행여 장인이 딴 맘을 먹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스타니슬라스는 광장을 만들고 거기에 루이 15세 동상을 세운다. 쉽게 말하면 ‘나 딴 맘 안 먹고 있으니까 사위는 걱정하지 말게’란 의미다.
힘없는 왕이었지만 현명한 군주였던 스타니슬라스는 낭시에 신도시와 광장, 새 궁전을 만들었다. 정치를 할 수 없다면 문화와 예술을 부흥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광장이 세워진 것은 2백52년 전인 1755년이다. 11세기에 도시 모습을 갖춘 낭시는 18세기 무렵엔 인구가 증가, 신도시가 필요하기도 했다. 스타니슬라스 광장은 모범적으로 건설됐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만든 베르사유가 스타니슬라스의 모델이다.
 
당시 유럽의 왕들은 저마다 베르사유 궁전과 광장을 만들고 싶어했다. 스타니슬라스 광장 건설에는 프랑스의 이름난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광장과 개선문을 설계한 건축가 에레는 베르사유를 설계한 망사르와 보프랑의 대를 잇는 건축가였다. 광장은 2백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개선문의 화려한 조각품은 장 라무라는 아티스트가 조각했다.
 
규모는 파리의 개선문보다 작지만 승전보를 알리는 황금천사상, 승리의 신과 지혜의 여신상 장식은 더 화려하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는 루이 15세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지금은 루이 15세 동상은 없고 스타니슬라스 동상이 서 있다. 프랑스대혁명 때 성난 군중이 동상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낭시 시민들은 훗날 낭시를 부흥시키고, 광장을 만든 스타니슬라스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광장은 화려하고 위엄 있다. 4각형 광장 모퉁이에는 화려한 분수대가 서 있고, 황금으로 도금된 6개의 철문은 도금을 했다. 거리의 카페에선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커피를 들이킨다. 켜켜이 쌓인 역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건축·공예·가구로 엿보는 아르누보
 
낭시는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바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지기 때문이다. 아르누보 역시 보불전쟁과 연관이 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이 끝난 뒤 낭시는 독일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독일령이 된 알사스 지방의 유민들이 몰려왔다. 무역을 통해 제법 부를 축적한 알사스 로렌 지방의 기업인들은 고향 가까운 낭시에 자리를 틀었다. 이들은 예술가를 후원했고, 이들이 일으킨 문화운동이 바로 아르누보다.
아르누보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이다.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벨기에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가장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곳이 낭시다. 루이 마조렐, 에밀 갈레, 유진 발랭, 자크 그루베 등이 낭시에서 활동했다. 아르누보의 흔적은 스타니슬라스 광장의 미술관, 공작의 궁이던 로렌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아르누보는 그림보다는 건축과 공예, 가구 등을 통해 발전했다.
 
현재 낭시에 남아 있는 아르누보 건축만 80여 동. 도심 투어에서는 철과 나무, 대리석 등 다양한 소재를 쓴 집을 통해 아르누보를 엿볼 수 있다. 건축가 앙드레가 지은 기찻길 옆 튤립 모양의 발코니가 있는 포니에 르포의 집은 최초의 아르누보 건축. 소흐 지역의 루이 마조렐의 집은 낭시 지방정부가 사들여 관광 코스로 개방하고 있다.
 
또 그가 만든 가구를 전시한 박물관에는 유럽은 물론 일본인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실용성은 없고 아름다움만 추구하던 아르누보 운동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엔 단순미를 강조한 아르데코가 일어났다. 유럽을 제대로 보려면 역사와 문화, 종교,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유럽을 방문하면 나중엔 남는 게 없다. 낭시는 유럽의 권력구도와 문화, 예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보여주는 좋은 곳이다.
 
▶여행수첩
 
낭시는 파리 동역에서 출발한다. 열차로 3시간 20분 거리다. 프랑스 여행은 음식을 제대로 즐길 줄 알아야 재미있다. 식당도 등급이 있다. 레스토랑과 브라세리, 카페테리아는 모두 식사를 할 수 있지만 제각각 특성이 있다. 레스토랑을 이용할 경우 프랑스인들은 웨이터를 10번 이상 부르며 와인과 음식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한다. 주문하는 데만 보통 30분 이상.
 
식사는 대략 3시간 이상 걸린다. 브라세리는 굴 요리 같은 해산물 요리나 스테이크를 주로 내놓는 집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 카페테리아는 값은 싸지만 메뉴가 많지 않고 큰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다. 스타니슬라스 광장에 있는 레스토랑 르 포아와 파크인 호텔 건너편 브라세리 엑셀시오르가 현지에서 유명한 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