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유물 유적 빼곡…도시 전체가 ‘박물관’

피나얀 2007. 5. 15. 21:10

 

출처-[한겨레 2007-05-15 17:18]

 



테마별로 떠나는 체험학습 /

 

천년도읍지 신라

 

경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건국한 이후 935년 망할 때까지 약 1천년 동안이나 신라의 도읍지였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 또는 금성으로 불리다가 935년 고려에 합쳐진 뒤에는 경주라는 이름을 됐다. 1천년간 한 나라의 수도였던 만큼 경주에는 엄청난 유물, 유적들이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릉처럼 곳곳에 솟아 있는 무덤들

 

아이는 가장 먼저 천마총에 가자고 했다.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이 진짜 있는지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릉원으로 향했다. 대릉원은 23개 왕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고분군. 소나무 숲 사이 사이에 무덤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었다.

 

미추왕릉이라는 표시판을 따라가니 사당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미추왕은 신라 왕 가운데 처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왕. 좀 더 걸어가니 꼭대기에 봉우리가 두 개 있는 무덤이 나왔다. 황남대총이다. 아이는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합쳐져 있기 때문이지”하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봉우리가 두 개인 이유를 설명했다.

 

드디어 천마총에 도착. 안으로 들어가니 유리벽 안쪽에 관을 안치했던 방이 그대로 보였다. 무덤의 느낌이 그대로 나도록 허리띠와 금관 등이 거무스름한 흙 주변에 흩어 놓았다. 위를 올려다 보니 동글동글한 커다란 돌이 두껍게 쌓여 있다. 신라의 무덤은 한번 완성하고 나면 다시 여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 돌들 때문이라고 했다. 천마도는 벽쪽에 마련된 전시공간 안에 있었다. 힘차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말의 생동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왕들이 태어나고 놀던 곳에 가보니

 

대릉원에서 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계림이 나온다. 김알지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만들었다는 김알지 탄생설화를 적은 비 말고는 실상 볼 게 없었다. 천년을 버텨온 나무들이 콘크리트를 덮어쓴 채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계림에서 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나정 역시 아이와 나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우물은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고 죽어가는 소나무들만 주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무성한 잡초만 파헤쳐진 땅들…. 우리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를 본 것 같아 씁쓸했다.

 

다행히 안압지의 보존 상태는 양호했다. 안압지는 신라시대에는 월지궁으로 불렸다. 이 곳에서 연회를 하거나 사신들에게 접대를 했다고 한다. 이 곳에선 연못이 일품이다. 연못 주변을 장식한 바위들은 모두 바다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안압지에는 임해전이라고 하는 큰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넓은 잔디밭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고 전해지는 포석정에도 갔다. 포석정은 원래 신라 왕의 별장에 딸린 정자의 이름. 지금은 정자도 사라지고 돌로 만든 물길만 남아 있다. 포석정은 신라의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나라-불국사

 

불국사는 신라 정신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인정했던 신라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중시했고, 그 결과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사도 만들었다.

 

불국사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나라를 뜻하는 대웅전 일대,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전 일대, 비로자나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한 비로전 일대 등.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다리를 지나야 한다. 2단으로 높게 놓여 있는 다리가 두 개 있는데, 아래쪽의 청운교와 위쪽의 백운교가 그것이다. 2단으로 만들어 놓은 이유는 부처님의 세계가 더 높고 먼 곳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웅전에 이르면 앞마당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마주보고 서 있다. 서쪽에 있는 석가탑은 단순하면서 날렵한 멋이 있고, 다보탑은 장식이 많고 복잡하고 화려하다. 법화경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경전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이를 보고 감탄하던 다보라는 부처님이 다보탑을 타고 땅에서 솟아올라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 반을 석가모니에게 내어주고 나란히 앉아 설법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