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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 세계의 연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피나얀 2007. 5. 22. 21:15

 

출처-[위클리조선 2007-05-22 14:21]

 

‘불꽃 같은 삶’ 추억하며 30주기 행사 잇따라 모국 그리스를 넘어 유럽·한국까지 이어져무대 위에선 몸을 던진 노래와 연기로… 선박왕 오나시스의 연인으로…숱한 화제 뿌리며 뜨거운 삶 오페라 역사 다시 쓰고 신화로 남아


1977년 9월 16일 아침, 프랑스 파리의 조르주 만델가(街)에 있는 한 아파트였다. 가정부가 화장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집주인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몸이 좋지 않아.” 집주인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풀썩 고꾸라졌다.
 


‘세기의 프리마돈나’ ‘오페라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53세였다. 그녀의 관이 집 밖으로 실려 나가던 날, 흐느껴 울던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브라보, 브라보~.” 옆에 있던 사람들도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마치 무대에 선 그녀가 노래를 마치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칼라스의 모국인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는 그녀의 30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리스는 2007년을 아예 ‘마리아 칼라스의 해’로 정했다. 지난 3월 26일 아테네 콘서트홀에서 열린 기념 콘서트에서 그리스 총리는 “그녀의 업적은 그리스인뿐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와 신화에 매료된 세계인에게 지금껏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해마다 열려온 그리스의 마리아칼라스 콩쿠르는 올해 ‘라 트라비아타’ 특별상을 마련했고 지난 3월 ‘더 베스트 비올레트’ 대회를 열었다. 비올레트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칼라스가 자주 맡았던 역이다. ‘세계 음악의 날’인 오는 6월 21일엔 그리스 아테네 국제문화센터 아테네움 콘서트홀에서 그녀를 기리는 공연이 열린다. 그리스 음악계는 이렇게 올해 칼라스의 삶을 되돌아보고, 칼라스의 노래를 부르며, 칼라스 이후의 신예를 발굴하는 등 ‘칼라스’라는 아이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오페라의 근원지’랄 수 있는 이탈리아에선 노래뿐 아니라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는 전시회도 열린다. 지난 3~4월 이탈리아 우딘(Udine)에 있는 ‘시민 박물관·역사·예술 갤러리’에선 ‘마리아 칼라스: 여성, 목소리 그리고 그 신화’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1948년 오페라 ‘투란도트’ 때의 공연 사진을 비롯해 그녀의 무대의상, 보석, 그녀가 출현했던 영화 ‘메디아’ 관련 자료 등이 선보였다.
 
로마의 악기박물관에서 지난 1월 열린 ‘마리아 칼라스, 신화는 계속된다’는 전시회에는 한 달간 2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 이 밖에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도 그녀가 주로 불렀던 곡을 연주하는 음악회와 그녀의 보석과 의상을 보여주는 전시들이 준비 중이다.
 


국내에선 경기도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오는 10월 마리아 칼라스 페스티벌이 열린다.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그녀의 오페라 의상을 전시하고 그와 함께 협연했던 오페라 가수들이 공연을 펼칠 계획이라고 한다.
 


30주기라고 해서 갑자기 그녀의 음반 판매량이 급증하진 않겠지만 세계 음반시장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더욱 굳어질 것 같다. 오페라 평론가 박종호씨는 “세계적 음반사 EMI가 자랑하는 최고의 아티스트는 여전히 마리아 칼라스”라며 “그녀가 노래한 독집 음반 30~40장과 오페라 전곡을 담은 20~30장의 음반은 판매량에서도 EMI 음반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했다.
 


30년 전 떠난 한 소프라노 가수를 지금껏 세상 사람이 추억하는 건 무슨 힘에서일까.

그녀는 1923년 미국의 그리스계 이민 가정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짧은 단발머리에 통통했던 마리아는 음악가가 꿈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음악 공부를 했다. 열 살 때 이미 관객 앞에서 비제의 ‘카르멘’ 중 ‘하바네라’를 부르며 재능을 보였다.
 


그리스 아테네국립음악원에서 혹독한 연습을 하며 실력을 갖춘 그녀는 24세였던 1947년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1954년 미국에서 데뷔한 이래 ‘토스카’ ‘노르마’ ‘라 트라비아타’ 등의 무대에 올라 ‘세기의 프리마돈나’로 성장했다.

일각에선 ‘가수 칼라스’보다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를 사랑했던 ‘여인 칼라스’ 얘기부터 떠올리곤 한다. 소프라노 가수로서 그녀의 삶이 화려했던 만큼, 늘 아프고 불행했던 그녀의 개인사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캔들을 뿌린 유명한 여인이기 전에, 음악사에 획을 그은 거장(巨匠)이었다.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가 “오페라 역사에서 기원전(BC)이란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오페라 평론가 박종호씨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묻혀버릴 뻔한 벨칸토 오페라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고, 1950~1960년대는 그녀가 활동한 덕분에 오페라 부흥기를 맞았다”고 했다. 벨칸토 창법은 아름다운 소리, 부드럽고 서정적인 가락, 화려한 연주 효과에 중점을 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창법이다.

그녀의 음악적 기량은 레나타 테발디, 비르기트 닐손,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등 당대의 다른 소프라노 가수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다.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두고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을 파고드는 독창적인 음색” “경이로운 악기 자체”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칼라스의 목소리는 사실 듣기 좋고 부드러운 미성(美聲)이 아니다.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고음으로 갈 땐 앙칼진 느낌마저 난다.
 


음악칼럼니스트 이재준씨는 “칼라스의 목소리는 10분 넘게 고음이 이어지며 지구력을 요하는 ‘광란의 아리아’ 역에서 진가를 발휘했다”고 한다. 성악도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특별했지만 그렇게 부르다간 성대가 망가져 따라할 수도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화가가 캔버스에 색칠을 하듯, 자신의 목소리에 색깔을 입힐 줄 알았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오페라의 불꽃은 가사인데, 칼라스는 가사만으로 음악을 드라마로 만드는 기적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독창적인 음색은 흡입력 있는 연기력을 만나 더욱 빛을 발했다. 칼라스는 노래를 한다기보다 그 배역으로 둔갑해 드라마가 아닌 실재 같은 연기를 펼쳤다. 때론 요부로, 때론 여신으로, 때론 버림 받은 여인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매드(mad) 장면에서 노래할 때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눈빛과 표정이 바뀌었고, 곧이어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버림 받은 초초상의 노래를 부를 때면 하도 애절해 듣는 이까지 수면 밑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녀는 예쁘고 멋있는 역이 아니라 과격하고 처절한 역을 무대에서 보여준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전형이다. 1950~1960년대 당시 관객들은 그녀를 보고 ‘오페라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오페라 ‘토스카’의 드레스 리허설 때, 가발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권력자에게 몸을 내줘야 하는 장면에서 흐느끼며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를 때였다.

마리아 칼라스를 말할 때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를 빼놓을 수 없다. 1948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처음 이 역을 맡은 뒤 1965년까지 20년 가까이 그는 90번 넘게 ‘노르마’ 역을 맡았다.
 


한 콘서트에서 그녀가 ‘노르마’의 ‘정결의 여신’(Casta diva)’을 노래할 때였다.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이 청중의 눈길을 끄는 것도 잠시, 무대에 오른 그녀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면 청중들은 극 중으로 빨려들어갔다. 어렵고 장식적이며 난해한 멜로디, 넓은 음역 사이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춤추었다.
 


여제사장으로서 계율을 어긴 금지된 사랑을 했지만 그 사랑에 배신 당하고, 사랑 때문에 민족을 배신한 참담한 심정을 노래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저 멀리 시선을 두는가 하면 하늘을 향해 쓰라린 심정을 내뱉는 동작은 현란했다. 칼라스는 사라지고 연약한 여인이자 강인한 여제사장만 무대 위에 있을 뿐이었다.
 


오페라평론가 박종호씨는 “당시 소프라노 가수들은 ‘노르마’가 워낙 폭넓은 음역과 기교를 요해 감히 부를 엄두를 못 냈다”며 “그런데 칼라스가 노르마를 부른 뒤, 이 오페라뿐 아니라 벨칸토 창법이 재해석됐다”고 했다. 벨리니를 비롯한 도니체티, 로시니의 곡을 중심으로 한 ‘벨칸토 오페라’가 칼라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의 평가를 제대로 받게 됐다는 말이다.
 


독창적 음색과 몰입하는 연기력을 갖춘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195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그녀가 오페라 ‘토스카’의 무대에 올랐을 땐, 16회나 커튼콜을 받았다. 그녀가 공연 무대에 오르면 밀라노 라 스칼라좌의 관객은 50% 이상 늘어났고, 오스트리아 빈에선 그녀가 부르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듣기 위해1만명의 사람이  2000석을 놓고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 시카고에선 그녀 덕분에 침체돼 있던 오페라 시장이 활기를 띠고 새로운 오페라극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칼라스는 오페라 역사를 새로 썼다. 그리고 그 신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비극 오페라만큼 아팠던 그녀의 사랑
 


오페라 가수로서 그녀의 삶은 화려했지만 개인사는 아팠다. 특히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에 늘 목말라 했다. 동료와 지인들은 “소프라노 가수로서 사랑받을 뿐 아니라 한 여성으로 사랑 받고 싶어했다”고 그녀를 기억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26세 때 자신의 후원자였던 28살 연상의 ‘스타 제조기’ 메네기니를 만나 결혼했다. 음악 활동을 하는 데에 그는 보금자리가 돼 줬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한때 영화 감독 루치아니 비스콘티를 사랑했지만 그것도 짧았다. 그는 그녀의 예술을 사랑했을 뿐 여성으로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 동성애자였다.

1957년 칼라스는 베니스의 한 파티장에서 그리스의 선박 재벌인 오나시스를 처음 만났다. 이듬해 칼라스와 메네기니 부부는 오나시스의 요트 항해에 초대를 받았고 항해가 끝날 무렵 칼라스는 오나시스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스 출신으로 미국에 이민온 뒤 어려운 시절을 겪었고, 자신의 능력으로 큰 돈을 벌며 성공했다는 점에서 칼라스와 오나시스는 닮은꼴이었다. 둘은 동거 생활도 했지만 그녀가 오나시스의 여자가 되고 싶어할수록 그는 그녀에게서 달아났다. 오나시스는 며칠 밤을 새워 칼라스 공연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보고 칼라스에게 “돈이 충분한데 왜 노래를 하느냐”고 했다. “아이를 낳으면 인연을 끊겠다”고 했다는 설도 있다.

1968년 오나시스는 5년 전 남편을 총격 사고로 잃은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다. 칼라스는 1975년 그가 죽은 뒤 “인생에 남은 게 없다”며 의욕을 잃은 채 살았다. 결국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77년 파리의 아파트에서 혼자 삶을 마감했다.

후대 사람들은 “칼라스는 한 여성으로서 오페라 속 주인공인 ‘노르마’ ‘비올레타’ ‘토스카’처럼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 갔다”고 한다.


1923  미국 뉴욕 출생
1937  그리스로 이주
1938  아테네 국립음악원 조기입학
1940  국립 리릭 극장과 계약
1941  오페라 ‘보카치오’의 베아트리체 역할로 프로 데뷔
1942  그리스에서 ‘토스카’ 첫 공연
1945  그리스 아테네에서 첫 단독 콘서트, 9월 미국으로 이주
1947  오페라 ‘조콘다(La Gioconda)’로 이탈리아 무대 데뷔
1948  오페라 ‘노르마’ 공연
1949  이탈리아인 사업가 메네기니와 결혼
1951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좌에서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 공연
1952  EMI와 음반 발매 계약
1954  30㎏감량
1958  프랑스 ‘파리 오페라’갈라 콘서트로 파리 무대 데뷔
1959  메네기니와 이혼,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교제
1965  프랑스 파리에서 ‘노르마’공연 중 건강문제로 중단
1965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 공연 (마지막 오페라 공연)
1966  미국 국적 포기, 그리스로 이주
1969  영화 ‘메디아’에서 메디아 역 연기
1971  미국 뉴욕의 줄리아드 음대에서 강의
1974  일본 삿포로에서 디 스테파노와 마지막 투어 공연
1977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사망
 





/ 황성혜 기자 coby0729@chosun.com 
황재웅 인턴기자 
 



마리아 칼라스의 명반들
 


영국 EMI, 칼라스 목소리 찾아 해적판까지 음원 사들여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 녹음의 측면에도 최고였으며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음반을 남겼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 극장에서 실황으로 녹음한 것, 심지어 팬들이 몰래 녹음한 해적판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음반은 영국 EMI 레코드의 레이블로 나와 있다. 해적판도 인기가 있으면 EMI에서 음원(音原)을 사들여서, 그들의 레이블로 바꾼 것도 있다. 때문에 같은 음원이 여러 레이블로 나와 있는 것이 칼라스 음반의 특징이다.
 


많은 팬이 그녀의 영상을 찾는데 적지 않은 콘서트, 다큐멘터리, 인터뷰 등의 영상물이 대부분 DVD로 나와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오페라 전곡(全曲) 공연 영상은 현재로선 전혀 남아있지 않다. 런던과 파리에서 공연한 ‘토스카’의 2막 장면 두 개만이 공식적으로 그녀의 오페라 전막(全幕) 영상(모두 EMI)이다.
 
 


벨리니 ‘노르마’ (1960년, EMI)
 


프랑코 코렐리(폴리오네), 크리스타 루드비히(아달지사) / 지휘 : 툴리오 세라핀 /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
 


칼라스는 자신에 의해 새롭게 빛을 본 오페라 ‘노르마’를 많이 공연했고 적지 않은 것이 녹음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1960년 스칼라극장 실황. 실제 무대에서 그녀의 노래는 권위와 여유로 넘치며, 입체적인 표현력은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하다. 특히 함께 출연한 테너 코렐리와 메조소프라노 루드비히의 열창도 녹음의 가치를 높인다.

 
 



도니체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1959년, EMI)
 


페루치오 탈리아비니(에드가르도), 피에로 카푸칠리(엔리코) / 지휘 : 툴리오 세라핀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합창단
 


칼라스가 남긴 몇 개의 ‘루치아’ 음반 중 유일한 스튜디오 녹음이다. EMI의 명 프로듀서 레그가 칼라스의 진가를 알아보고 진행한 녹음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다. 3막 ‘광란의 장면’은 최고 표현력의 집대성으로 그녀의 한 음 한 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에 가슴을 졸이도록 한다. 함께 녹음한 과거의 명테너 탈리아비니의 음성도 큰 매력이다.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1956년, EMI)
 
주세페 디 스테파노(만리코), 롤란도 파네라이(루나), 페도라 바르비에리(아주체나) / 지휘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
 


칼라스는 이 음반에서 벨리니와 도니체티와는 또 다른 열정적인 카리스마와 긴장감을 드러내면서, 초기 베르디 오페라의 새로운 진가와 매력을 보여준다. 또한 지휘자 카라얀의 이 곡에 대한 치밀한 재단(裁斷)과 그녀의 재능을 위한 카라얀의 배려가 음반의 가치를 높인다. 함께 녹음한 1950년대 세계적 명가수와의 앙상블도 뛰어나다.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1955년, EMI)
 


주세페 디 스테파노(알프레도), 에토레 바스티아니니(제르몽) / 지휘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
 


전설적인 연출가 비스콘티가 연출했던 역사적인 스칼라극장의 실황으로, 집중해 듣는다면 2막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명연이다. 함께 공연한 스테파노와 바스티아니니 역시 최고의 열창을 보이고 줄리니의 지휘도 대단하다. 하지만 여러 번의 리마스터링 작업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음반의 음질이 무척 열악하다.
 
 



푸치니 ‘토스카’(1953년, EMI)
 


주세페 디 스테파노(카바라도시), 티토 곱비(스카르피아) / 지휘 : 빅토르 데 사바타 /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
 


‘노르마’나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칼라스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레퍼토리가 ‘토스카’다.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음반 속에서 감각들이 살아나 꿈틀댄다. 스테파노의 소리에서는 활력이, 곱비의 음성에서는 노련함이 넘친다. 사바타의 지휘도 명암의 대비가 뚜렷하고 극적이다. 
 
 


비제 ‘카르멘’(1964년, EMI)
 


니콜라이 게다(호세), 로베르 마사르(에스카미요), 안드레아 기요(미카엘라) / 지휘 : 조르주 프레트르 /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
 


‘카르멘’의 음반 중 ‘카라얀의 카르멘’과 더불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칼라스의 카르멘’이다. 한마디로 칼라스 혼자서 전작을 거의 다 휘어잡는데, 낭음조의 노래나 색채적인 연기는 실로 대단하다. 그녀가 실제 극장 무대에서는 한 번도 카르멘을 불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