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열하에서 여행의 가치를 깨닫다

피나얀 2007. 5. 28. 20:45

 

출처-[오마이뉴스 2007-05-28 18:28]

 

나에게는 역마살이 있다. 길을 나서지 않은 지 열흘만 되면 몸이 쑤신다. 결국 계기를 만들어 한국에 가거나 지방 출장을 떠난다. 임신 6개월에 아침이면 다리에 쥐가 나는 와이프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니 얼마나 나쁜 놈인가. 하지만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여행의 시간이 일주일 남짓이 아니라 1년이 되고, 3년이 되었을 테니 그나마 위로해야 할 듯 싶다. 나만큼이나 역마살이 있는 안사람에게는 몸을 풀면 같이 다니자는 말로 위로할 수밖에.

▲ 1780년 건륭제의 만수절 때 주 행사장인 청더 피슈상장 완수위앤 모습. 이곳에 당시의 세계가 모였고, 연암은 관찰자였다
ⓒ2007 조창완
하지만 그 말 안에는 항상 부담이 있다. 이제 6살이 넘은 용우와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하고 여행을 떠날 것인가. 그런데 이번 여행 길에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 버렸다. 지난 며칠간 수필 전문 잡지 '에세이21'(발행인 이정림)에서 하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따라서'를 진행했다. 사실 나에게 여행의 진행은 일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 즐기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정은 내 삶에서 큰 전환의 계기가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강사는 고미숙 선생이다. 2004년 1월 여행사를 시작하고 두 번째로 만든 테마여행이 '고미숙과 떠나는 열하기행'이었다. 그 여행이 4월에 있었으니 근 3년 만에 그 여행이 진행된 것이다. 열하를 따라가면서 돌이켜본 내 3년, 그리고 다시금 사람들을 만나면서 젖어본 여행의 향기에 빠져들었다.

사실 길이 좋은 것은 풍경보다도 사람이 있어서다. 같이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행 길에 만나는 이들도 있다. 사실 그간 내 머리 안에는 '노마디즘'(유목)이라는 단어가 가득했다. 나 자신이 유목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 자신도 유목에 대한 개념을 잘 세우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에게 "유목주의는 대우가 시도했다 실패했지만 이제 한국이라는 장소에 머물지 않고 세계로 나가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아오포라는 깃대이자 서낭당을 세우고 유럽까지 향했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나라를 가슴에 안고 세계를 주유하면서 살아가는 신유목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라고 물어보면 답이 궁색했을 것 같다. 이번 길에서 내가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찾은 것 같다. 물론 그 안내자는 고미숙 선생이었다. 3년 만에 만난 고미숙 선생은 더 강하고, 더 넓어진 것 같다.

▲ 천고의 명문 '야출고북구기'가 나온 구베이코우 장성의 기념비
ⓒ2007 조창완
내가 동행한 여정은 베이징에서 출발해 구베이코우(古北口) 장성을 통과해 진산링(金山嶺) 장성을 본 후 청더(承德)를 다녀오는 길이다. 베이징을 출발한 후 고 선생은 우선 자신이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여성이라는 핸디캡과 보호틀로 꽉 찬 대학을 벗어나 수유리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고미숙 선생은 얼마 전에 이를 바탕으로 <호모 쿵푸스>라는 책을 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모였다. 물론 그 바탕에는 밥을 같이하는 식구의 철학과 소원하는 것들을 알리는 습관이 바탕으로 작용했다. 지금은 넓어진 용산의 '수유+너머'에서도 동시에 100명이 같이 밥을 먹는다고 하는데, 고 선생에게는 밥을 같이 먹음으로써 정을 쌓는 독특한 철학이 있었다. 또한 우리는 웹 사이트가 필요해, 우리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해, 중국어 잘하는 사람이 필요해, 의사가 필요해…, 라고 말하면 꼭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거나 내부에서 발견하는 생활 방식이 존재했다.

▲ 만리장성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는 진산링 장성의 웅자한 모습
ⓒ2007 조창완
어떻든 고미숙 선생은 열하일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리라이팅하는 책(<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출간했다. 그저 딱딱한 고전에 대한 신선한 시도이자, 연암이 무덤에서 뛰어나올 만큼 신선한 시도였다. 그래서 결국 길들은 이어졌다.

옌산산맥이 보일 무렵부터 고 선생은 낭독의 문화를 말한다. 곡기가 끊어져도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선비 집안과 더불어 낭랑한 책 읽는 소리의 매력을 이야기한다. 이후 천고의 명문이라는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를 낭독했다.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이목이 누(累)가 되지 않고, 이목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뒤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 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 '열하일기' 이름의 고향인 열하 기념비. 이곳에서 작은 강이 시작됐다
ⓒ2007 조창완
학창 시절 죽어있던 고전의 텍스트가 살아서 여행자들의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왔다. 구베이코우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진산링 장성으로 향했다. 2명밖에 탈 수 없어 더디지만 '만리장성 진산독수'(萬里長城 金山獨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낸다. 상당수의 여행자가 빠다링 장성을 다녀왔는데, 그곳에 다녀온 이들일수록 더 큰 소리로 감탄한다.

내려올 무렵에 비가 왔다. 그래도 다 보고 나서 참가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시 승덕으로 길을 재촉한다. 여행자들도 지식의 흥겨움에 취하고 고미숙 선생이나 에세이21의 편집인인 이정림 선생도 흥이 나서 이야기를 잇는다.

첫날 빗속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청더 피슈산좡을 돌았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강이자 <열하일기>라는 책명의 배경이 된 러허(熱河)도 둘러 봤다. 빗속의 산장은 맑을 때 보다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밤에 황제가 먹는다는 '만한전석'을 간단히 한 버전으로 식사를 하고, 삼삼오오 주변을 헤매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에 건륭제가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소포탈라궁에 들렀다. 판첸 라마의 거처였던 이곳에서 연암은 당시 국제관계를 읽어냈다. 사실 이곳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모인 열하 자체가 그에게는 정말 깊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마저 푸닝스(普寧寺)를 본 후 식사를 하고 급히 베이징으로 향했다.

▲ 황제들이 즐겼다는 만한전석의 축소판 요리를 즐기다
ⓒ2007 조창완
오는 길에 고미숙 선생은 이제 이야기를 한 단계 더 넘겼다. 죽음마저도 초탈한 진정한 지식인 연암의 삶이 주는 맛들로 시작했다. 다음은 좀더 까칠하게 갔다. '농공상'(農工商)에 미래와 지식을 주는 덕분에 밥을 먹는 사(士)들의 부패나 무능을 신랄하게 말했다. 지금의 대학이 지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죽어있는 사회라는 것으로 가자 모두들 숙연해 졌다.

베이징에 돌아와 서민시장에 들러서 물건을 사는 것을 도와줬다. 패키지로 다니면 느끼지 못하는 쇼핑의 맛이자, 실제 중국 물가를 볼 수 있는 현장이다. 그곳까지가 내 맡은 임무다. 사실 이번 길을 나에게 너무 행복했다. 나를 볼 때마다 성공하라고 등을 두드리는 어른들은 내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분들이다. 그들을 보내고 나는 사무실로 향했다.

나에게도 이번 여행은 뜨끔했다. 고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유목이 여행이랑 다른 것은 여행을 통해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고도 변하지 않으면 헛것이다. 공부나 책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 용을 새겨 놓은 푸닝스 향로
ⓒ2007 조창완
나 자신에게도 물었다. 나 스스로 여행을 하고 그 기록을 남기는 등의 작업으로 유목으로의 전환을 꿈꾸지만 나 역시 진정한 나 자신으로 변화하는가를 물어봤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움은 용기가 됐다. 여행 전에 나는 이전에 만들었던 중국여행 카페를 중문화웹진 노마드(http://cafe.daum.net/chinaalja)로 전환했다. 이곳을 통해 베이징 등 중국에 있는 이들과 호흡하고 콘텐츠 세상의 주역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해볼 것이다.

고미숙 선생이 찾아오는 이들에게 밥을 사주는 마음으로 수유+너머를 아름다운 공부 공간으로 만들었다. 흔히 '꽌시'는 물 위에 이는 파문과 같아서 자연스럽게 다른 데로 번지게 마련이다. 사실 오랜만에 하는 공부는 기자의 가슴을 뛰게 했다. 또한 책장에 먼지를 쌓아가는 <열하일기>를 다시 읽어보자는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