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노컷뉴스 2007-06-07 14:12
사람의 삶을 흔히 여행에 비유한다. 마지막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스스로 가야할 길을 정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헤르만헤세는 '방황은 삶의 새로운 비유를 찾으려는 동경'이라 했다. 때로 무자비하고 덧없게만 여겨지는 인생에서 우리는 수없이 방황한다. 그러나 다채로운 삶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제각기 우주에 대한 의미있는 비유를 만들고, 그것이 곧 '사는 이유'가 된다.
4일간의 연휴를 맞아 남해로 떠났다. 마음이란 지도를 따라 그저 길을 나서는 일에 큰 준비는 필요없다. 하지만 특별한 벗과 함께였기에 이번 여행의 의미가 남달랐다.
보리들녘은 이미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바다를 가르며 시원하게 뻗은 창선·삼천포 대교를 건너 본격적으로 남해땅에 입성했다. 한낮의 바다는 햇살을 온몸으로 품어 눈부시게 반짝였고, 그 위로 바나나 보트 한 대가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신나게 달려나갔다. 수평선에 걸려있는 섬들은 마치 아이를 지켜보는 노인처럼 그저 묵묵히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대교를 건너자 곧 남해만의 사람살이가 드러났다. 마늘의 산지답게 해안도로 가드레일에 줄줄이 널어둔 마늘다발이 인상적이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자그마한 촌부는 한낮 더위에도 아랑곳않고 보리타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확기를 맞은 마늘밭에는 한 명, 혹은 너댓 명의 일손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고, 6월 중순쯤에 거둬들일 벼는 완연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출렁였다.
모든 곡식의 황금빛을 가을의 산물로만 여겨온 어설픈 도시인의 눈에, 6월도 안 돼 벌써 누렇게 익은 보리들녘과 검게 그을린 농민들의 피부는 낯설고도 감동적이었다.
생지옥 같던 타향살이…그리고 조국의 '마지막 선물'
한껏 여유로이 해안도로의 풍광을 즐기며 도착한 곳은 삼동면 물건리에 자리잡은 독일마을.
함께온 벗이 언젠가 보고 와 무척 아름답다 한 곳이다.
3만여 평의 부지에 남해군에서 30여억 원을 들여 조성한 이 마을은 재독일 교포들의 한국정착에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다.
1961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제1목표인 경제발전을 쟁취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남자와 여자를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했고, 그 대가로 당시 정부 총 수출액의 30%인 3500만불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빈곤탈출과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조국을 떠난 수많은 청년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생지옥'과 다름없는 기약없는 타향살이였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의 근대화의 경제발전에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이제야 고향땅에 돌아와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빨간색 지붕과 하얀색 회벽, 집집마다 잘 가꿔진 정원과 마을 어디서든 내려다보이는 남해의 절경. 마치 동화 속 그림 같은 이 곳에서 아주 오래 전의 조국산천을 기억하고 있을 이들이 돌아와 어떤 감회에 젖을지 궁금해졌다.
독일마을에서 내려와 오른쪽 도로로 2~3분만 달리면 해오름예술촌을 만난다.
오래 전 한 사람이 남해에 들어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폐교를 개조해 오늘과 같은 아름다운 관광장소로 만든 것이라 했다.
예술촌 안팎을 가득 매운 특이하고도 정겨운 소품들, 더없이 정성드려 가꿔놓은 정원, 다양한 주제별로 교실과 복도에 꾸며놓은 각종 체험장과 전시물, 나무의자 등받이나 교실 곳곳에 만들어놓은 목간판에 씌어진 예쁜 시구와 편지들.
어느 하나 빠짐없이 주인장의 섬세하고 애정어린 심성이 묻어났다.
지천에 널려있는 볼거리에 정신이 팔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에 걸려 예술촌을 감싼 대숲에 온화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당에 서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니 남해는 농촌과 어촌의 모습을 고루 갖추고 있어 어느 곳이고 자연과 사람이 살을 맞대고 사는 정겨움이 느껴졌다.
억척스러운 삶의 의지가 빚어낸 절경 '다랭이 마을'
바다 곁에 사는 사람들이 바다에 의지해 사는 것이 당연할 것 같으나, 그것은 바다라는 대자연이 인간을 허락할 때만이 가능하다.
여행 둘째날, 아침을 먹고 섬의 왼편 남쪽에 자리잡은 홍현리 다랭이 마을을 찾았다.
바다와 맞닥뜨린 절벽 위에 조성된 이 마을은 남해에서도 가장 독특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마침 방향이 같아 합승하게 된 이곳 토박이 할아버지에 따르면 다랭이 마을 주민 중에 바닷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바다가 너무 사나워 어업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친 파도가 침범하지 않는 절벽 위에 집을 짓고 가파른 절벽을 억척스럽게 일궈 계단식 논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데 논이 되기 전 이곳은 해방 직전까지 일본 사람들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그 시절 일본인들이 하나같이 무례하고 흉포할 것 같으나,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들도 그저 힘든 타향살이 가운데, 남해 사람들과 동거동락하는 이웃사촌이었단다. 그렇다보니 전쟁이 끝나고 허겁지겁 그들이 떠나갈 때에는 안 되고 서운해 눈물도 흘리셨다고.
작은 밭떼기를 뜻하는 '다랭이'란 현재의 마을명칭은 불려진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그저 가천마을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절벽 위로 난 해안도로를 시원스레 달리면서, 할아버지는 "나 어릴 땐 이런 길도, 차도 없었다. 참 좋은 세상 됐다"며 격세지감을 토로했다.
함께 한 벗에 관하여
이번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 동행은 다름아닌 내 어머니다.
세월이 갈 수록 모녀의 정이란 것은 참으로 각별하고 돈독한 것이 된다.
'속궁합' '음식궁합'이 있듯 '여행궁합'이란 것이 있는데 어머니와 본인이 더없는 찰떡궁합의 길벗임을 최근에야 알았다.
여행의 좋은 벗이란 길가에 핀 작은 꽃과도 같고, 한낮에 부는 바람과도 같고, 산속에서 만난 우물과도 같은 것이다.
더디게나마 철 들어가며 부모에게 효도함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처음은 부모를 부모로서 자랑스럽게 해드리는 것이고 그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것은, 당신들을 다시금 소년과 소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몸이 늙지 마음은 늙는 것이 아니라 했다. 가끔 무리 지어 산에 오르거나, 도시락을 싸서 한강변에 놀러온 어르신들이 마치 아이들처럼 장난을 치고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본다. 그러고보면 나잇값이라 하여 눈치를 보는 것이지, 그저 사는 걱정만 없으면 누구든 순수하지 못할까.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무심코 길을 걷는 본인과는 달리 여기저기 반가운 것들이 많으셨다.
한참 운전을 하다 퍼뜩 차를 세우시더니 '이 귀한 게 어찌 여기 피었냐'시며 도로변에서 돗나물을 한바구니 캐셨다. 또다른 길에선 어릴 적 친구들과 따먹었다는 나무열매를 보고 신이 나서는 '즉석서리(?)'를 감행하셨다. 나비 한 마리 꽃 하나 보면서도 '어찌 저리 고우냐' 감탄을 하시고, 그리 비싸지도 않은 소박한 시골음식에도 돈을 계산하는 딸에게 '고맙다'며 맛있게 드셨다.
어느새 여행의 막바지다. 어머니만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타지생할 하고부터 한두번 일도 아닌데 괜스레 심술을 내고 결국엔 별다른 이유없이 어머니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여적지 막내티를 못 벗어난 덩치만 큰 딸자식을 보며 어머니도 코끝이 발개 지셔서는 급기야 세 시간을 더 함께 있다 헤어졌다.
애초에 여행이란 삶의 새로운 비유를 얻고자 떠나는 것이라 했다.
여행을 가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결국 사람사는 모습은 어디든 똑같단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그것을 비뤄 우리네 삶을 다시금 바라보면, 간과하거나 잃어버린 그 속의 진실과 가치를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앞으로의 더 많은 여행에 부모님과의 동행을 다짐하며 모든 딸아들에게 부모님과의 길걷기를 권해본다.
'금강산도 식후경' 지당한 말씀!
산에 가면 산에서 나는, 바다에 가면 바다에서 나는 그 장소만의 토박이 음식을 먹어라.
남해와 사천의 대표 음식 한가지씩을 소개한다.
남해의 별미로는 볼락구이. 볼락은 사시사철 다 맛볼 수 있는 어종이지만 4.5월에 그 고소함이 절정에 오르니 때를 맞춰 먹는 것이 좋겠다.
하동의 별미로는 섬진강 재첩으로 만든 재첩비빔밥. 재첩 특유의 담백함과 싱싱한 야채, 맛갈스런 고추장이 어우러져 더운날 입맛을 돋궈주는 데 더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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