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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태풍… 편지=파랑주의보… 결혼 이야기=작업의 정석…
[조선일보 ‘스크린’ 기자]
‘내츄럴 본 영화광’이며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감독이었던 프랑소와 트뤼포는 젊은 시절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시네마테크에서 동료들과 함께 미국산 장르영화들을 보며 쉼 없이 반복되는 패턴과 관습을 학습했고, 한편으로는 그 안에 자신만의 개성을 주입했던 히치콕 같은 ‘작가 감독’들을 숭배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분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미국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영화들은 모두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들 사이의 어떠한 유사성이 그 영화들을 사랑하는 조건인지 모르겠지만, 트뤼포의 명제는 최근 한국영화에도 적용 가능한 어떤 화두가 아닐까 싶다. 매년 수십 편씩 쏟아지는 수많은 한국영화들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씩은 길을 잃은 듯한 멍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급기야, 조금은 단순무식하지만 일종의 작업가설을 만들었다. “1992년 ‘결혼 이야기’ 이후, 한국영화는 끝없는 반복이다.”
무슨 얘기냐고? 말 그대로다. 현재 한국의 상업적 장르영화는 1992년 이후에 발명되었다는 거다. 이 시기는 이른바 ‘기획영화’가 충무로에 도입되며 영화제작의 토대 자체가 변했던 때. 나운규의 ‘아리랑’이 나왔던 1926년만큼이나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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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정립한 ‘1992년 이론’ 안에서 ‘최신’ 개봉작들을 바라보면 약간은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2005년 ‘태풍’의 짝은?
1999년 ‘쉬리’다(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웰컴 투 동막골’이 있을 거다). ‘태풍’과 ‘쉬리’는 분단 상황을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그 현실적 토대는 북한 민중들의 비참한 삶이다. ‘쉬리’의 박무영(최민식)과 ‘태풍’의 씬(장동건)은 모두 피맺힌 절규를 내뱉고, 각각
연인 관계와 남매 관계라는 멜로드라마 요소를 지닌다. 달라진 점은 이데올로기다. ‘쉬리’가 반공주의 안에서 진동한다면, ‘태풍’은 두 남자의
대결구도와 가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파랑주의보’는 1997년에 나온 ‘편지’의 변주다. 수목원은 바닷가로, 뇌종양에 걸린 남자는 골수암에 걸린 여자로 바뀌었다. 바뀐 부분이 있다면 수호(차태현)의 할아버지인 장의사 만금(이순재)의 존재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만금의 속 깊은 순애보로 인해 ‘파랑주의보’는 ‘편지’보다 더 깊은 주름을 지닌 영화가 되었다.
그렇다면 ‘작업의 정석’은? 이 영화의 시작은 두말 할 것 없이 1992년의 ‘결혼 이야기’다. 90년대 이후 등장한 모든 로맨틱 코미디는 ‘결혼 이야기’에 한두 가지씩은 빚지고 있고 ‘작업의 정석’도 예외는 아니다. 팬시 느낌의 인테리어 비주얼, 핑퐁처럼 오가는 대사, 코믹한 상황 설정, 전문직 종사자인 주인공…. 차이가 있다면 기혼·미혼 여부와 늘어난 조연진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은 ‘초록 물고기’(97)의 한석규 동생 쯤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엔 ‘오아시스’(02)의 설경구가 있다. ‘가문의 위기’의 큰형님인 ‘조폭 마누라’(01)는, 조금 억지를 쓴다면 ‘게임의 법칙’(95)의 사촌동생 뻘이다. ‘청연’은 ‘역도산’(04)을 거쳐 ‘김의 전쟁’(92)과도 통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친절한 금자씨’처럼 외국 족보가 아닐까 싶은 영화도 있고, ‘왕의 남자’는 60년대 사극 전성기까지 가야 그 짝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영화가 끝없는 반복임에도 새로움을 느끼는 건, 작은 변주 때문일 것이다. ‘101번째 프로포즈’(93) 이후 숱하게 반복된 소심남 스토리임에도 ‘광식이 동생 광태’가 새롭게 느껴지는 건 스테플러 심이라는 사소한 디테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2005년의 끝자락에서 생각해본다. 올해 한국영화 중에 ‘성공적 변주’는 몇 편이나 있었을까? 어딘가 닮아 있기에 사랑스러우면서도 디테일에 조금은 과할 정도의 애정을 쏟는 ‘새로운 장르영화’가, 2006년엔 좀더 많이 등장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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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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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2005-12-2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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