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육아】

"아빠, TV 안보기로 했잖아"

피나얀 2006. 5. 16. 18:35

 

`텔레돌이 `달수씨의 TV 없는 세상

엉겁결 약속은 했지만,시선은 리모컨에 고정

몰래 TV보다 딱~걸려망신살에 굳은 재결심

`물꼬`터진 가족 대화 어느새 스위트홈 됐네

 

"거, 무신 말도 안 되는 소리! 치와라." 경상도 사나이답게 `한 성격`하는 남편 달수 씨로부터 즉답이 날아왔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하지만 반발 강도가 너무 세다. 앞으로 이 일을 어쩐담….

 

나의 사랑하는 남편 달수 씨는 회사 일과 TV, 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야구광인 그는 롯데 경기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봐야 한다. 롯데팀 야구가 있는 날에는 TV 앞에 코를 박은 채 자리를 뜰 줄 모른다.

 

밥도 김밥으로 대신한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 1주일만 TV를 끄고 살면 어떨까? 우리 유진이 유치원에서 꼭 한 번 실행해 보라는데…. 실행일지 제출하래요"라고 제안했으니 통할 리 없다.

 

달수 씨, "유치원이면 아(유진)나 잘 가르치면 됐지, 와 남의 집구석에 대고 TV를 보라, 마라 하노?"하며 길길이 뛴다. 평소 과묵하던 그가 이럴 땐 말이 많아진다.

 

"롯데경긴 그렇다 쳐도 이승엽 경기, 위성미 경기는 니도 좋아하지 않노?"라고 되묻는다. 또 "뉴스는 어쩌고, 영화채널, 드라마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강변한다.

 

하긴 나도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김수현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못 본다면 무진장 아쉬울 것 같다. 하지만 낮에 유진이와 한 약속을 깰 수는 없다.

 

유진이는 "엄마, 우리 토끼반 선생님이 꼭 해야 된데…. 약속하지?"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물론 나도 TV를 완전히 끊으라면 죽을 맛이겠지만 이참에 TV만화라면 꺼벅 죽는 현철이의 버릇도 고치고, 현철이와 툭 하면 채널 쟁탈전을 벌이는 남편에게도 한방(?) 먹이고 싶으니 강행해야지…. 결국 옥신각신한 끝에 내가 이겼다.

 

달수 씨 엉겁결에 "까짓 거, 함 해보지 뭐. 죽기야 할라고"라며 밀어붙이는 것 아닌가.

 

이튿날 아침. 눈을 뜬 달수 씨 습관적으로 TV를 켠다. 출근 준비를 하며 TV를 보는 게 습관이다. 내가 "여보, 약속 잊었어요?"라며 리모컨을 빼앗자 "워케, 이래? 오늘 날씨는 알아야 할 거 아냐?"라며 도로 TV를 살린다.

 

이럴 줄 알고 나는 아침 일찍 인터넷에서 오늘의 날씨정보와 롯데 경기일정 등을 출력해 놓았다. 프린트를 들이밀자 달수 씨, 눈을 부라리며 종이를 휙 낚아챈다.

 

맞벌이 부부인 남편과 나는 퇴근하면 늘 `좌회전 우회전` 부부다. 우회전인 달수 씨는 옷도 벗기 전에 우측 TV 앞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리모컨을 눌러댄다.

 

달수 씨의 지정석이다. 나는? 물론 주방으로 좌회전해 쌀을 씻고, 밥을 앉힌다. 우회전한 달수 씨, "리모컨 어딨어?"를 외친다. 아침에 한바탕 실랑이를 해놓곤 저렇게 깜깜하다니…. 방에 있던 유진이와 현철이가 쫓아나와 한수 거든다.

 

"아빠, 오늘부터 TV 안보기로 했잖아." 아이들은 만화영화도 거부(?)한 채 엄마, 아빠가 퇴근하길 목 빼고 기다렸나 보다. 4학년인 현철이는 늘 아빠가 집에 오면 채널을 양보해야 한다.

 

그래서 현철이는 `아빠가 늦게 퇴근했으면…`하고 바랄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리모컨을 감췄으니 딱히 달수 씨가 고정석을 차지할 이유가 없다.

 

TV를 못 보게 돼 허전해진 달수 씨, 빨리 밥 내놓으라고 닦달이다. 이윽고 저녁시간. 평소엔 당연히 TV를 켜놓고 밥을 먹었는데 오늘은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이어진다.

 

식사 중 대화를 안 했더니 이렇게 어색할 수가. 귀염둥이 유진이가 말을 꺼내, 모처럼 `대화라이제이션`을 했다.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현철이가 아빠의 팔을 잡아끈다. 놀이터에서 공받기를 하자는 거다. 남편은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운동을 마치고 들이닥친 남편, 연방 TV 쪽으로 시선이 꽂힌다. 리모컨을 찾느라 안절부절못한다. 안되겠다 싶어 TV에 식탁보를 씌웠다.

 

"유진아. 9시인데 아빠 뉴스만 보면 안 될까?" "선생님이 약속 꼭 지키래요." 속이 끓는 남편, 소파로 가 벌렁 누워버린다.

 

이튿날. 오늘은 TV에서 롯데경기가 중계되는 날이다. 어제처럼 달수 씨가 잘 버텨줄지 걱정이다. 금단현상이 심해지면 어쩌나….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남편은 좌불안석이다.

 

줄담배를 피우느라 현관을 무시로 들락거린다. 라디오를 가져다 주자 "내 참, 경기가 눈에 어른거리는데 우째 소리만 듣노?"라며 박차고 나선다. 금단현상이 극에 치달았나 보다.

 

유진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뿌리친 달수 씨, 결국 통닭집으로 날랐다.

 

셋째 날 오늘은 내가 수목드라마를 봐야 하는 날이다. 이틀이나 TV를 안 봤더니 너무 허전하다. 오후에 만화영화를 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현철이에게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고선 내가 왜 이런담…. 꾀를 냈다.

 

"얘들아, 아랫집 명훈이네 두 시간만 놀러갔다 와라". 두 녀석, 신이 나서 달려나간다.

 

달수 씨는 이때다 싶어 식탁보를 들추곤 TV를 켰다. 반가운 스포츠뉴스 시간이다. "오늘따라 앵커가 어째 이렇게 더 예뻐 보이냐"며 달수 씨 TV 안으로 들어갈 기세다. 그런데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린다.

 

인기척에 놀란 우리 부부, 황급히 TV를 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빠, 내가 만화영화 쫌만 보겠다고 할 땐 그렇게 안 된다고 하더니, 뭐야?" "엄마도 나빠, 선생님한테 이제 뭐라고 해."

 

아들과 딸이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아 정말 TV 안 보기, 너무 힘들다. 이미 우리 네 가족 모두 TV에 중독이 될 대로 됐으니. 그래도 앞으로는 무작정 TV를 켜지 말고 각자 꼭 보고 싶은 것을 정해 계획대로 보기로 했으니 이게 어딘가.

 

또 아이들 방에만 있던 책들이 거실에 많이 등장했다. 책이라면 질색하던 현철이도 곧잘 동화책을 집어든다.

 

"애들 산수교과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봤네. 막혔던 세면대 배관도 뚫고, 애들 하고도 엄청 놀아주었으니 담주부터 TV는 내 거야. 군소리 없기! 그래도 월드컵 때 이런 거 하자고 안해 천만다행이네…. 흠흠."

 

협박조이지만 달수 씨 표정이 부드럽다. 아이들 표정도 환하다. 오늘은 신통한 TV 프로도 없으니 한강둔치로 밤 피크닉을 떠나볼까.

 

습관적으로 줄곧 TV를 끼고 살았던 생활에서 풀려나니 이렇게 다른 세계가 많을 줄이야.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 '대중경제문화지'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출처-[헤럴드경제 2006-05-16 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