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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사회적 살인의 공간 괴물은 왜 한강에 사는가?

피나얀 2006. 7. 20. 21:33

 

출처-[필름 2.0 2006-07-19 21:40]

 

 


돌연변이 괴물과 가난한 가족을 품어 안은 공간은 바로 한강이다. 봉준호 감독은 한강을 산업화를 낳은 기적의 공간, 휴식과 낭만의 여유로운 공간에서 낯선 죽음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아직도 괴물이 국회의사당을 부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괴물이 63빌딩을 부수고 하는 고질라를 생각하더라.” 하마터면 봉준호 감독은 더 황당한 질문을 받을 뻔 했다. “잠수교가 분리되면서 괴물이 반포대교를 두 동강 내나요?” 같은 질문 말이다.

 

88년도 올림픽대회의 서울 유치가 결정된 지, 꼬박 1년 뒤인 1982년 9월 28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한강종합개발의 청사진을 내놓고 시공식의 축포를 쏘아 올렸다. 개발의 골자는 이런 것이었다. 수중보(물길을 막아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만든 둑)를 설치해 한강 운하시대를 연다, 210만 평의 둔치를 시민들의 휴식처로 개방한다, 강변도로(현 올림픽대로)를 최고 8차로까지 확장한다.

 

그리고 잠수교를 분리해 배가 지나갈 때 들어 올린다. 잠수교를 들어 올린다는 지극히 독창적인 발상은 훗날 ‘없던 일’이 됐다. 다리를 들어 올릴 때의 교통 정체를 고려해 한강종합개발 청사진에서 삭제된 것이다. 한강. 나이가 천차만별인 27개의 다리가 촘촘히 놓여 있고, 융단처럼 펼쳐진 둔치에 12군데의 시민공원이 방석처럼 놓여 있으며, 해질녘이면 금빛으로 빛나는 63빌딩과 밤이 깊어갈수록 아름다운 유람선이 여유와 낭만을 만들어가는 한강. 그곳에서 괴물이 출현한다.

 

<더 리버>가 <괴물>이 되기까지

 

애초 <더 리버>라는 가제를 달았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을 이해하는 데는 괴물만큼이나 한강이 중요하다. 아니 한강을 이해해야 괴물을 이해할 수 있고, 한강을 이해해야 주인공 가족을 이해할 수 있다. 고교시절 잠실대교 남단의 장미아파트에 살았던 봉준호 감독은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기곤 했는데, 이때 잠실대교 교각에서 검은색 괴생물체가 기어 올라오다가 강으로 떨어지는 걸 봤다고 한다.

 

당시 수험생이었던 봉준호는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면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고, ‘봉준호가 고등학교 때 본드를 했냐?’는 농담을 낳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괴물>의 원초적인 제작 배경으로 기득권을 얻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발발해, 주한미군 지위협정(SOFA)의 개정 요구로 줄기차게 이어진 앨버트 맥팔랜드 독극물 방류 사건이 없었다면 고등학생 봉준호가 목격했던 괴생물체는 <괴물>이라는 영화로 탄생되기 요원했을 것이다.

 

당시 미8군 영안실 부책임자였던 앨버트 맥팔랜드는 미군 사망 시 시체의 본국송환을 위해 방부처리 하는 데 쓰이는 포름알데히드 20박스를 싱크대에 버릴 것을 명령했는데 명령을 받은 담당자는 독극물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면 암과 출산장애를 야기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맥팔랜드는 욕설과 함께 실행을 종용했다. <괴물>의 첫 장면은 정확히 이 사건을 재현하고 있으며, 맥팔랜드로 사료되는 미군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미스터 김, 그냥 버려요. 한강은 크고 넓어요. 이건 명령이오.”

 

진짜인지 환각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괴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던 봉준호에게 맥팔랜드 사건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셈이 됐다. “너무나 완벽한 실제 사건이 생긴 것이다. 고질라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졌듯, 내 영화에도 안성맞춤의 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이 영화의 오프닝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봉준호는 말한다.

 

2003년 <살인의 추억>을 끝낸 후, 차기작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대재앙을 소재로, 재앙의 규모보다는 한국사회의 수습 안 되는 히스테리에 집중하려고 한다”고 말했던 그에게 한강은 서울의 심장 광화문 한복판보다, 테헤란로의 초고층 빌딩가보다 괴물이 출현하는 훨씬 더 매력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라인 강의 기적’을 빗대 만들어진 조어 ‘한강의 기적’에는 고도 압축성장의 한국사회의 수습 안 되는 히스테리가 진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들의 휴식처인 한강 시민공원에는 평균 가로 5m, 높이 3.5m, 깊이 2.5m짜리 직사각형 컨테이너 안에 꾸려진 매점이 있다. <괴물>의 주인공인 박희봉(변희봉)과 박강두(송강호) 부자가 생업을 꾸려가는 매점도 바로 그것이다. 올림픽 개최를 앞둔 전두환 정권은 외관상 깨끗한 서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상계동을 비롯한 20여 빈민지역에서 그들을 철거시켰다.

 

이에 철거민들은 최소한의 생활 터전을 정부에 요구하며 맞서 싸웠고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매점운영권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는 희봉이네 가족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는 경위를 뒷받침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가 한강에서 캐낸 1,962억 원어치의 모래와 자갈을 건설현장에 팔아 한강종합개발 공사비를 충당했다는 점이다.

 

희봉이네 가족은 한강에서 파낸 모래와 자갈로 지은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해 판자촌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고, 동시에 모래와 자갈을 파내고 시멘트로 둔치를 만든 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사회적인 약자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등 전작에서 서민들의 공간,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을 영화적으로 펼쳐 놓는 데 뛰어난 관찰력과 통찰력을 발휘한 봉준호 감독은 왜 괴물이 한강에서, 그러나 63빌딩과 유람선은 안 보이는 한강에서 출현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강은 서민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취업비관, 성적비관, 가정불화, 부도 등으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이 일 년에 이백 명 넘게 몸을 던지는 곳이자 개발독재의 부실공사로 꽃다운 여학생이 등교 길에 죽어가는 곳, 바로 ‘사회적 살인’이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장미아파트에 살던 시절 아래층에 살던 여학생이 자살한 일을 경험한 봉준호 감독은 2003년 연출한 단편영화 를 찍던 성산대교 근처에서 직접 익사체를 발견하기도 했다. <괴물> 기자시사 무대인사에서 “구상한 지 19년, 준비한 지 5년, 달라붙어 작업한 지 3년 만에 완성됐다”며 완성의 흥분을 전하던 봉준호의 소감에는 한강과 관련한 개인적, 사회적 체험이 영화로 완성되는 감격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 자신이 ‘공간 맞춤형 시나리오’라고 불렀던 <괴물> 시나리오에는 한강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한강의 공간과 다리, 교각과 둔치에 맞춰 괴물과 주인공들의 동선, 그들의 감정이 변하는 드라마가 따라갔다.

 

한강에서 발로 쓰고 찍은 영화

 

 

한강에서 자전거를 즐겨 타던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 이후 본격적인 <괴물> 시나리오 작업 및 헌팅 작업에 나서게 된다.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쓰면서 “피해자 시체가 발견된 곳에 직접 가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때 들끓었던 분노의 힘으로 영화를 찍은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는 봉준호는 한편으로는 참고가 될 만한 할리우드영화를 보고 또 보며 분석하는 한편, 한편으로는 아들과 함께 한강을 자전거로 달리고, 자연스럽게 매점 주인과 친분도 쌓으면서 영화에 쓰일 만한 감정과 정보를 용의주도하게 쌓아갔다.

 

무엇보다 계절, 날씨, 일과에 따른 한강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어떤 괴물이 저곳에 어울릴지 구상했다.

 

2004년 10월 무렵 <괴물> 제작진에 참여한 김준수 조감독은 그동안 봉준호 감독이 찍어온 한강 사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그 분량이 수천 장에 이를 뿐 아니라 거기에 담긴 한강의 모습이란 평소 동호대교를 자주 이용하면서 다리 위에서 본 석양쯤이나 기억하던 김준수 조감독에게 무척 낯선 것이었다.

 

미리 합류한 제작부와 연출부가 한강 남북단을 세밀하고 집요하게 헌팅하며 모아온 자료 또한 “도대체 한강에서 어떤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던 그가 단번에 생각을 고쳐먹기에 충분했다. 다리 위가 아니라 다리 밑. 빗물이 흐르는 우수구와 생활 폐수가 흐르는 하수구가 분리되어 강 전체가 미로처럼 연결된 한강 다리 밑은 이 도시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촬영에 용이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 곳곳의 항구와 항만까지 뒤졌지만 그런 스케일의 수로는 한강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인구 천만 명이 넘는 도시, 정권의 주도 아래 불도저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공간은 나올 수가 없는 거였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공간을 가장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괴물>의 전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강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보여주는가가 관건이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후인, 2005년 8월 19일 당시 서울 시장이자 서울영상위원회의 운영위원장인 이명박 씨가 난생 처음으로 영화 촬영장을 찾았다. 이명박 시장은 평소 영화가 가지는 도시 마케팅 효과에 큰 관심을 가져 이미 홍콩영화 <서울공략>과 서울 야경촬영을 최초로 허가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행정가였다.

 

관련 공직자들과 촬영장을 방문한 이명박 시장은 방문 기념으로 5천 원짜리 교통카드를 전 스탭들에게 나눠줬으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취사가 금지된 곳에 식당차가 올 수 있도록 허가했고, 자전거 도로에서 차량이동을 가능하도록 했고,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한강 우수구와 하수구를 제작진에게 개방한 것 등이 이명박 시장이 보여준 <괴물>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 때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촬영했는데, 이번에는 한강이니 얼마나 좋으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고 봉준호 감독이 술회하듯 한강은 시장이 어쩔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한강 하류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의 영향으로 오전 11시에서 오후 5시 외의 시간대는 둔치의 수위를 일정하게 촬영할 수 없었다.

 

수위 때문에 가장 애를 먹은 장면은 박희봉이 괴물과 빗속 사투를 벌이던 동작대교 신이었다. 초겨울인 11월, 실제로 비가 많이 내렸던 데다 한강 상류 팔당댐에서 방류를 하자 제작진은 ‘12세 관람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수위 조절에 실패, 무려 18일간 한 장면을 찍었다. 그들은 이것을 ‘18일간의 사투’라고 부른다. 스탭들은 “앞으로는 동작대교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했고, 봉준호 감독은 “지금도 동작대교를 지날 때마다 바로 고개를 돌린다”고 말했다.

 

영화촬영 중 파상풍에 걸릴까 싶어 출장 간호사를 불러 전 스탭이 파상풍 예방주사를 맞았다거나, 악취가 심한 하수구를 다니느라 밥을 먹기 힘들었다거나, 감전 사고의 위험을 무릎 쓰고 장비를 나르고 설치했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쉽게 잊혔지만 한강 다리 중 삭막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동작대교 밑에서 18일 동안 고생한 일은 악몽처럼 잊히지 않았다.

 

리얼리즘이자 장르 영화의 공간

 

 

<괴물>은 초여름의 한가한 한강 둔치에 느닷없이 괴물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창한 대낮, 알록달록한 나들이옷을 입은 시민들이 정체불명의 괴생물체에게 습격당한다. 성수대교에서 죽은 여학생을 연상시키는 교복 입은 여중생 박현서(고아성)가 괴물에게 납치당한 뒤로 한강은 특유의 부산함과 발랄함을 잃고 음습하고 거대한 죽음의 늪 같은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표정을 바꾼다.

 

실제 한강은 한강종합개발을 거치면서 강이라기보다는 커다란 호수 같은 느낌으로 변했다. 백사장과 갈대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던 한강은 물과 시멘트로 뒤덮혔다. 강 북단은 강변북로의 거대한 고가 구조물이, 강 남단은 아파트숲이 장벽처럼 강변을 막고 있어서 강물은 흐르기보다 담겨 있는 인상이다. 이곳에 독극물이 흐르고, 그것이 돌연변이 괴물을 낳고, 괴물은 시멘트로 막힌 은신처에서 복수를 꿈꾼다.

 

요즘은 시설 보수와 편의시설, 갖가지 치장으로 삭막한 이미지를 많이 던져버린 한강이지만 <괴물>의 한강에는 질주하는 인라인스케이터의 속도감이나 조깅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건강함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영화가 지시하는 시간대는 2000년대지만 <괴물>은 1990년대 관객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한강을 환기시키려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이 화성을 통해 80년대를 정리했듯이, 한강을 통해서 90년대를 정리한 게 아닌가 싶다.

 

세계에서 이렇게 크고 다리가 많은 강도 없다. 이것이 모두 시대적으로 만들어진 산업화의 산물이고, 그걸 누리는 사람과 끝자락까지 몰려나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이 한강에서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말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동시대적이면서도 역사적이고 반성적인 공간을 찾아 괴물이 한강에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 아닌 결론이 나온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괴물이 습격하는 첫 장면이 지난 후 세상의 종말 같은 느낌이 나도록 색을 많이 빼고 촬영했다. 특히 동작대교 사투 장면은 가장 삭막하고, 가장 처절하고, 가장 슬픈 전투처럼 보이도록 촬영했다”고 말한다.

 

19년 전, 한강변에서 목격한, 어쩌면 잘못 본 하나의 이미지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강에서 벌어진 사건과 지난 몇 년 동안 한강에서 발견한 모습과 지난 몇 년 동안 한강에서 찾아낸 이야기를 버무린 끝에 한 편의 영화로 탄생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과 속내를 알 수 없이 흐르는 둔탁한 한강이 <괴물>이 낳은 괴물의 서식지이자, 본격적인 한국 SF 괴수 재난영화의 고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