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겨레21 2006-08-2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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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정말로 뻔뻔해져서 뻔뻔한 내가 용서되는 나이에 이르렀네… 꿈은 된장녀의
라이프지만 현실은 김수현 드라마, 오 철없는 일기여
서른다섯의 일기를 쓰자니 서른의 흔적이 떠올랐다. 어언 5년 전, 서른 살에 이렇게 썼다.
“애정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20대 후반의 봄날이 갔다. …어느새 서른 살이었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최승자 ‘삼십세’)… 그날 혼자서 <봄날은 간다>를 보러 갔다.
한바탕 통곡을 해보겠다는 심사였다. 영화비가 아깝지 않을 만큼.”(<씨네21> 내 인생의 영화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전향을 한다면 서른다섯 무렵이 아닐까
여전히 애정만세는 부르지 못하고 세월은 흘렀다. 그래도 그때는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하면서 스스로 비아냥거리는 낌새라도 있지 않았을까(아닌가?). 이제는 정말로 뻔뻔해져서, 뻔뻔한 내가 진심으로 용서가 된다. 누군가 전향을 한다면, 서른다섯 무렵이 아니었을까, 진심으로 이해한다. 서른다섯의 노총각 아저씨는 일신의 안위를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며, 더 이상 누군가 때문에 울지도 않는다. 그렇게 내게는 스물다섯에서 서른까지보다 서른에서 서른다섯까지 거리가 더 멀어 보인다.
서른다섯 살의 하루는 청국장 가루를 우유에 타서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수미일관, 수미쌍관의 하루를 살고 있었다. 서른다섯 살의 하루는 스트레칭으로 마무리된다. 아마도 민감한 사춘기, 국어책에서 “인생에 있어 무언가 일관된 것이 있어야겠다”, 뭐 이런 구절을 읽어서 생긴 후유증임이 틀림없다. 체제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배 나오기를 권하는 체제에서 배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지겨워, 지겨워”를 입에 달고 살다가, 날짜 변경선에 즈음해 집에 돌아오면 리모컨부터 잡는다.
운이 좋으면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고 또 보고’ 하다가 <프렌즈>를 보면서 킬킬거린다. ‘된장남’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 주를 견딘 자신이 너무나 대견해서 일주일에 한두 잔씩 스스로에게 스타벅스 커피를 선물한다. 여름에는 커피프라푸치노, 겨울에는 카라멜 마키아토, 반드시 ‘그랑데’(Grande) 사이즈로. 두해 연속 건강진단에서 정밀검사를 요한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무서워서 병원도 가지 못한다. 나의 캐리커처를 그린다면, 머리 빠진 피터팬?
진작에 30대 중반이 오기 전에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른에 가족과 아름다운 이별을 꿈꿨으나, 소년 가장을 ‘모시고’ 사는 독거노인이 애처로워 뜨지도 못한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라니, 심란한 시나리오다. 심란한 시나리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최근에 나왔다. 어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낼 모래면 마흔인데…”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찌나 리얼한지 어머니의 한숨에 12층 아파트가 가라앉는 줄 알았다.
마흔, 마흔이라니! 결혼한 동생에게 남편 주라고 모자를 주었더니 “오빠는 머리를 가려야 괜찮아” 하면서 모자를 돌려주었을 때도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이웃집 할아버지도 카메오로 등장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옆집 할아버지가 “기자야? 선보게 해줄까?”라고 묻기에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냅다 도망쳤다. 이렇게 나는 겉멋과 속사정이 수미쌍관 된장 냄새 나는 된장남이다. 꿈은 된장녀의 라이프지만, 현실은 김수현 드라마인 것이다.
된장남은 어느 날 마루에 옆으로 누워서 ‘돈오돈수’의 깨달음을 얻었다. 문득 어머니는 나보다 ‘겨우’ 다섯 살 많은 나이에 혼자 되셨고, 만장하신 아해들을 혼자서 키우셨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믿기지 않아 어머니의 나이를 손꼽아 다시 헤아려보았다. 세상은 이렇게 빠르게 바뀐다. 이렇게 철없는 ‘올드 미스 다이어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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