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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가을의 전령사’로 내한하는 첼리스트 장한나

피나얀 2006. 11. 15. 17:49

 

출처-[레이디경향 2006-11-14 15:33]



11세 나이에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국제 콩쿨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하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신동 첼리스트 장한나. 어느새 스물넷 꽃다운 아가씨로 자라 당당히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다. 오는 11월 전국 7개 도시 순회공연을 앞둔 장한나는 고국에서 경험할 늦가을 낭만에 벌써부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낭만적인 연주 레퍼토리로 7개 도시 순회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 맑고 해사한 얼굴만 보자면 아직도 어린애만 같다. 특유의 천진하고 명랑한 웃음도 여전하다. 그러나 올해로 벌써 스물넷. 이젠 어엿한 숙녀로 자랐다. 몇 해 전 하버드 대학 철학부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아니 벌써?’하고 놀란 기억이 있다.

당연하다는 듯 이름 뒤에 ‘양’을 붙여 ‘한나양’ 하고 부르던 것이 이번엔 문득 망설여졌다. ‘한나씨’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그렇게 불러보니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 어색해 웃는다. 아무래도 그에게선 사랑스런 막내 여동생 같은 친근함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래서 아직은 한나씨 아닌 한나양이다.

그가 11월 18일부터 30일까지 전국 7개 도시를 돌며 연주회를 연다. 연주회의 컨셉트는 ‘로맨틱’. 낭만적인 계절 가을에 걸맞은 슈만, 쇼팽,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레퍼토리로 준비했다.

 

특히 장한나의 쇼스타코비치 연주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쇼스타코비치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말 발매한 다섯 번째 음반에는 ‘첼로 협주곡 1번’과 ‘첼로 소나타’가 수록돼 있고 세계 언론은 그의 남다른 해석과 연주에 일제히 극찬을 보냈다. 최근 영국의 유명 클래식 음악지 그라모폰이 선정한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의 명단에도 장한나의 이름이 당당히 포함돼 있다.

장한나의 이번 순회 공연은 11월 18일 충남 금산의 ‘다락원 생명의 집’을 시작으로,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22일 성남아트센터, 25일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26일 전주 소리문화의전당, 28일 부산문화회관, 30일 광주문화예술회관으로 이어진다. 첫 연주회가 있을 금산은 이번이 초행이라며 “금산에서 인삼이 정말 많이 나느냐”고 묻기도 했다.

 

작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큰 무대와는 다른가요?


큰 무대도 서보고 작은 무대도 서봤지만 무대는 작으면 작을수록 속삭이는 연주가 가능해요. 그것이 작은 무대의 매력이죠. 하지만 진정한 연주자라면 무대의 크기라는 한계를 떠나서 객석의 맨 앞줄에 앉은 관객에게나 제일 뒷줄에 앉은 관객에게나 똑같은 감동을 줄 수 있어야겠지요.

고국 무대에서 연주할 때, 연주자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5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잖아요. 그래서인지 한국은 늘 그리운 고향이에요. 한국에 올 때마다 공항에 내리면 기분이 붕 뜨고 정말 즐거워요. 일단 한국에서는 TV를 켜도 다 한국말만 들리고…(웃음). 나만의 고향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그 생각에 힘이 펄펄 솟을 정도지요. 물론 무대에서는 장소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한국의 무대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일단 그래요.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장한나양은 본업은 음악, 전공 공부는 ‘심각한 취미’라고 말한다.

이번 내한 공연은 어떤 취지로 기획했고, 어떤 곡을 연주할 계획인지요.

 
이번 공연의 부제가 ‘로맨틱’이에요. 가을에는 낭만이 공기 중에 떠다니잖아요(웃음). 로맨티시즘이 강세였던 1800년대 초반 유럽에는 쇼팽, 슈만 같은 낭만주의 연주가가 활동했어요. 두 사람은 1810년생 동갑이고 마흔 살 무렵에 요절했다는 것도 비슷하죠. 특히 슈만은 아내 클라라와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로 유명하잖아요.

쇼팽 역시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으로 유명하고. 당시는 인간의 고뇌하는 모습에 매료되던 시기였어요. 논리나 이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람의 감정이잖아요.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칭송하던 시절이었죠. 음악, 문학, 미술 분야에서도 그런 양상이 두드러졌구요.

불확실한 인간의 감성과 그런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마치 산 정상에서 안개가 자욱한 계곡을 내려다보는 그런 느낌과도 같죠. 불안, 초조, 분노, 슬픔, 희망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쇼핑, 슈만의 음악 속에 멜랑콜리하게 녹아 있어요.

쇼스타코비치의 소나타도 연주할 예정인데,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속에서도 저는 ‘로맨틱함’을 읽어요. 쇼스타코비치는 구소련의 스탈린 정권에서 철저히 감시받으면서 작곡 활동을 했어요. 쇼스타코비치가 훌륭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천재성을 지키고 음악을 통해 무한히 표현해냈다는 거예요. 그 강인함에 마음을 찌르는 감동이 있지요.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켰으니 그의 음악도 어떻게 보면 무척 로맨틱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연주자로서 로맨티시즘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제 나름대로 로맨틱함을 이렇게 정의해요. 내가 지금 현재 있는 모습보다 더 높은 고도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자세,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저 너머 더 높은 곳에 있는 그 무언가를 추구하는 그런 모습… 저는 언제, 무슨 곡을 연주하든지 내가 가지고 태어난 모든 정열을 다 쏟아 붓는 편이에요. 그런데다 이번에 연주할 곡들은 모두 낭만적인 곡이니 특히 더 열정적인 연주가 되지 않을까 기대돼요.

하버드 입학 당시부터 전공이 철학이라는 것이 큰 화제가 됐지요. 철학 공부를 해보니 어떤가요? 음악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런 건 있어요. 평소 생활할 때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공부하는 것은 철학과 심리학, 행동과학이 섞인 분야인데 그렇다 보니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어려운 공부이지만 그 공부를 통해서 내가 더 성숙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어요. 인간적인 성숙은 연주자로서의 생활 태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렇지만 철학 공부가 내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저는 아무래도 연주자니까 전공 공부는 하나의 심각한 취미 정도로 보면 돼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그냥 단순한 취미는 아니고 심각한 취미(웃음). 하버드의 학점에는 A 플러스가 없어요. 가장 높은 점수가 A 학점인데 주위 친구들은 A 마이너스만 나와도 속상해서 난리가 나요. 교수님께 항의하기도 하고. 하지만 저는 A 마이너스만 받아도 입이 쩍 벌어지죠 뭐(웃음).

클래식 연주가라고 해서 클래식 음악만 듣는 것은 아니겠지요? 즐겨 듣는 대중음악이 있나요? 혹시 노래방에 가본 적은 있어요?

아무래도 클래식을 많이 들어요. 최근에 팝 아티스트 내킹콜(Nat King Cole)의 음악을 우연히 들었는데 참 좋아서 CD를 사서 한동안 듣기도 했어요. 비틀스는 전부터 좋아했고, 가요는 전혀 모른다고 봐야 해요. 사촌동생이 절 보고 어떻게 그렇게 아무도 모를 수 있냐고 핀잔을 주더라구요. 노래방에 가본 적도 없구요. 내가 못 가본 방이 노래방 말고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찜찔방이에요(웃음).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찜질방엘 한번 가볼까 싶어요.

여가 시간엔 주로 뭘 하면서 보내나요?


주로 책을 읽어요. 평상시에 독서를 즐기는 편이거든요. 전공 서적이 워낙 딱딱한 내용들이라서 주로 소설을 즐겨 읽지요. 최근에는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그리고 집 근처에 좋은 호수가 하나 있는데 호숫가를 자주 산책해요. 어찌나 아름다운지 매일 가봐도 매일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해요.
만약 음악가가 안 됐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 적 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때 꿈이 심장전문의였어요. 그냥 의사가 아니라 딱 심장전문의. 그래서 사촌동생을 데리고 의사놀이한다면서 여기저기 꾹~ 꾹~ 찔러댔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이후에 미국에 와서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심장 수술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는데 그 엄청난 압박과 긴장 속에서 진행되는 수술 과정이 굉장히 매력적이더라구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뭔가를 이뤄내는 일에 제가 매료되는 것 같아요.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을 꼽는다면?


당연히 부모님이죠. 제가 5학년 때 미국에 갔는데 보통은 조기 유학이라고 해서 자녀만 보내거나 엄마하고만 간다거나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두 분이 같이 오셨어요. 저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를 한 셈이지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정말 대단한 결심을 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도 전혀 못했고, 또 미국에 온지 2년 만에 로스트로포비치 콩쿨에서 우승을 해서 바로 연주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어요.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부모님의 꾸준하고 따듯한 관심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어요.

음악가로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요?


가장 행복할 때는 물론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죠. 연주에 몰입하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음악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거죠. 그때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에요. 손톱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면 벌써 연주가 달라지거든요. 보람 있을 때는 내 연주를 듣고 사람들이 감동할 때.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내 연주를 듣고 감동받았다고 저에게 이야기할 때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고 감동받아요.

음악가로서 장기적인 꿈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연주자로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 멈추지 않는 것이죠. 음악가라면 스스로 비판도 하고 칭찬도 하고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냉정함이 필요해요. 거기에 끊임없이 발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고. 나이 혹은 경력과 상관없이 그런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저도 한두 살 나이 들면서 느끼는 것은 음악가가 사회에서 할 역할이 있지 않나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어린이 음악회입니다.

저는 음악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 친구들만 봐도 자라면서 클래식 연주를 접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많은 경우에 그렇지요. 자라면서 클래식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그 음악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제가 그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것을 한국에서 꼭 시작하고 싶구요.

무엇보다 내가 한국 사람이고, 내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45일 정도 축제를 기획해서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형식이 될 거예요. 하지만 어린이 음악회라고 해서 무조건 쉽고 가벼운 음악이 아니라 최상의 음악 연주, 가장 훌륭한 수준의 연주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빠르면 내년 여름부터, 늦어도 후년 여름에는 시작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

한나양은 어려서도 참 귀여웠지만 자랄수록 점점 예뻐지네요. 교제 중인 남자친구는 혹시 없어요? 이게 마지막 질문!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해요. 아직 없어요(웃음). 아직은 남자친구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그렇게 크지 않아요. 제가 바라는 사람은 우선 솔직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삶에 대해 아주 정열적인 사람. 전 그런 사람이 좋아요. 언젠가는 생기겠죠. 그럼 제일 먼저 기자 언니한테 알려줄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