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뉴스메이커 2006-11-29 11:51]
비어있으니 가득하구나 - 양주 회암사지
생각이 사라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자연의 풍경이었다. 감히 그 정경을 두고 적멸이라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적멸에 다다라본 적은 없지만 내 상상 속에 그곳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적멸은 그저 그것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움직임보다 더 큰 움직임으로 남았던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그친 적멸은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움직임일 터이니 말이다. - 이지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중에서
입담 좋은 유홍준 교수는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어머니의 입을 빌려 폐사지를 ‘망한 절’이라 했다. ‘망한 절을 망했다 하지 않고 거기서 좋은 것을 찾아 말했으니 복 받을 일’이라고도 했다. 불자들께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떨 때는 ‘망한 절’이 ‘흥한 절’보다 더 절답게 느껴진다.
‘장하던 금전벽우 잔재되고 남은 터’에 쑥대와 방초만이 무성하고, 빈 공간에 염불소리와 목탁소리 대신 산새소리와 낙엽 구르는 소리만 쓸쓸히 흘러 다닌다. 적멸은 아니더라도 적요하기 그지없으니, 이 폐허가 바로 가장 큰 절간인 것이다.
양주의 회암사는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지만 지공화상에서 나옹선사, 무학대사로 이어지며 고려시대 불교를 크게 일으켰던 3대사찰의 하나였다.
조선 건국 후 억불숭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밑에서 그나마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조언자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의 존재로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끝내 소멸의 운을 맞게 된 것은 명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파국의 전야는 외려 화려했다. 불심이 두터웠던 문정대비(중종의 비, 명종의 어머니)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는 회암사에 머물며 불교중흥을 도모했다.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이룩한 보우는 1565년(명종 20) 4월 5일 낙성식을 겸한 성대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그러나 이틀 후 문정대비가 서거하니, 때를 기다려온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그는 사월초파일날 제주도로 유배되어 마침내 제주목사 변협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와 함께 회암사도 불길에 휩싸여 폐사되고 말았다.
이이의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에서 보여지듯 조선의 유가(儒家)들에게 보우는 요승이자 적승(賊僧)이었지만, 그는 본디 수도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종종 산천을 돌아보는 만행을 즐거움으로 삼던 ‘숨어사는 현자’였다.
그를 문정대비에게 천거한 것도 저잣거리에서 그와 어울리던 유가들이었다. 거부할 겨를도 없이 급작스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면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간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며 지배이데올로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다.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니/무엇 때문에 문밖으로 달려갈 필요가 있겠나/경계와 마음, 마음과 경계가 다른 경계 아니니/대지에 가득한 산과 강이 무엇인고/적적한 가을 멧부리에 성긴 비 지나가고/바람 앞에 푸른 풀잎 너울너울 춤을 - 보우 ‘오도송’ 중에서
세상과의 치열한 싸움도 끊기고 경계와 경계마저 허물어져버린 지금, 흙으로 돌아간 것과 흙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들이 모여 여기 또 다른 가람을 열었다.
그 폐허의 가람 위에 또다시 계절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눈이 내려쌓이면 그렇게 또 지워지는 것인지 채워지는 것인지 알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다만 비어 있으니 가득할 뿐이다.
●●● 늦가을 회암사지는 1만여 평의 빈 터에 적요만이 가득하다. 봄이면 그토록 흐드러지던 벚꽃나무의 잎마저 시들고, 여기저기 흩어진 주춧돌 사이의 잡초들 또한 서리 맞아 누렇게 변해만 갈 때 회암사지는 비로소 ‘폐사지의 미학’을 완성한다.
옛 부도전이었을 법한 곳에 남은 키 큰 부도 1기와, 절이 불탄 후 새로 지은 회암사 앞 언덕바지에 자리한 지공, 나옹, 무학 3화상(和尙)의 부도와 부도비, 석등 등이 옛 회암사가 남긴 유물들이다.
특히 조선시대 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무학대사의 부도와 그 앞에 놓인 앙증맞은 쌍사자 석등이 눈여겨볼 만하다. 돌아오는 길에 소흘에서 고모리 쪽으로 길을 잡으면 늦가을 호숫가의 낭만적인 정취를 거쳐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 가는 길 의정부 - 양주 - 덕정사거리(우회전) - 회암사지 - 소흘 - 고모리저수지 - 국립수목원(예약관람) - 광릉 - 봉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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