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요리】

노랗고 고슬고슬한 속살이 제맛이네

피나얀 2007. 1. 11. 19:41

 

출처-[오마이뉴스 2007-01-11 11:28]



ⓒ2007 유스테판


소한을 하루 앞둔 날이라 날씨는 고추처럼 차고 매웠다. 언제나 소한이 다가오면 집의 창문이 덜컹거리고 세상은 꽁꽁 얼어붙는 듯햇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가서 얼어죽었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더 춥고 매서워야 할 대한이 소한보다 오히려 더 '푹하다'는 뜻이다. 아내는 저녁밥을 차리느라 한창이다. 한상 가득 차려진 밥상에서 올라오는 훈기로 주방은 훈훈하다.

내가 식탁 앞에 앉는 걸 보자 아내는 오늘 밤 고구마 한 그릇을 쪄 놓을테니 배가 출출할 때 먹으라고 했다. 알고 보면 군것질로 고구마만큼 좋은 것도 없다. 껍질을 벗겨 한입 물면 구수한 군밤처럼 씹히는 고물 맛에 반한 지도 오래다. 이런 내 식성 때문에 아내는 틈만 나면 고구마를 쪄 놓는다.

가족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나 혼자만 애들처럼 군것질을 하는 걸 보면 괜히 창피할 때도 있다. 아직도 생고구마가 조금 남아 있는 걸 보니 작년 가을 회사에서 한 박스 사서 보관해 놓은 것들이다.

시식후 고구마 한 박스를 사다

그 때 주인이 회사 직원을 통해서 미리 신청 받은 고구마를 한 트럭 싣고 와서 나눠 준 일이 있었다. 밭에서 직접 캔 고구마를 직원들에게 싼 값으로 팔았는데 팔기 전 고구마를 한 소쿠리 쪄와 시식을 시켜 주기도 했다. 미처 사지 못한 직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소쿠리 속에는 굵은 것과 잔 것이 함께 섞여 있었는데 맛을 보니 차이가 났다. 팔뚝만치 굵은 것들은 무르고 속을 열어봐도 물기가 젖어 있어 별 맛이 없었는데 잔 것들은 달랐다. 살갗이 탱탱하고 껍질이 살살 벗겨지는 것이 밤처럼 고슬고슬한 고물이 잔뜩 들어 있어 입이 구수했다.

신청 받은 박스를 주인아저씨가 현관문 옆에 착착 쌓아놓는 사이 시식하려고 놓아둔 고구마는 금방 동이 나버렸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회사는 구수한 고구마 냄새로 넘쳐 흘렀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고구마 맛에 반해 바로 옆에 있던 주인아주머니에게 슬쩍 한마디를 건넸다.

"고구마 맛이 참 좋네요. 잔 고구마로 한 박스 주세요."

아주머니는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지었다. 난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문득 시골에서 밭을 일구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흔 해 전 쯤 됐나 보다. 그 때를 돌이켜 보면 이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거의 같은 또래의 나이가 되었을지 모른다. 까맣게 탄 얼굴, 까칠한 손, 슬쩍 보았어도 따가운 뙤약볕에 들볶이고 얼키설키 솟아오르는 풀과 씨름한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구마가 후딱 잘 팔리는 것을 보면 고구마 농사가 쉬운 것 같아도 그게 아니다. 다른 농사처럼 고구마 농사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줄기만 꽂아 놓으면 제가 알아 척척 잘 크는 것 같지만 고구마를 캐서 한 군데 보관할 때까지 진이 다 빠지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거들면서 터득한 경험이다. 주무시기 전에 끙끙 앓는 소리를 내셨던 부모님, 그 부모님을 보면 농부의 심정을 알고도 남는다.

고구마 통가리 속에 차곡차곡 쌓인 추억

ⓒ2007 유스테판


그 당시 부모님들은 고구마를 캐면 통가리 속에 보관했다. 창고가 있었지만 날이 추워지면 잘 썩는 고구마의 체질 탓이다. 깡마른 옥수수대를 돗자리처럼 엮어 구들장 윗목에 동그랗게 말아 세우고 그 안에 고구마를 차곡차곡 쟁여두었다. 통가리가 벌어질 정도로 가득 담긴 고구마 때문에 방안에는 늘 눅눅한 냄새가 차올랐지만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다.

한 겨울 동안 배를 든든하게 불릴 양식이 그 안에 잔뜩 들어 있어 안심이 되었다. 봄이 와서 고구마 모종을 할 때까지 이 통가리는 윗목에 턱하니 놓여 가족들과 함께 했다. 어쩌다 통가리 밑에 눌린 고구마를 꺼내 보면 새부리처럼 빨간 싹이 삐죽삐죽 돋아나오기도 했다. 아마 이 고구마도 봄이 그리웠나 싶었다.

배가 출출하면 생고구마를 깎아 먹기도 했고 불씨가 살아 있는 뜨거운 화로불 속에 고구마를 묻어 구어 먹기도 했다. 그것도 배가 안차면 아궁이 속에 장작이나 잘 마른 솔가지를 디밀어 불을 피우고 펄펄 끓는 양은솥에 고구마를 쏟아 붓고 삶아먹기도 했다.

밤이 빨리 지나갈까봐 고구마를 까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노랗게 드러난 속살을 한 입 베어 물면 뜨거움을 참지 못해 혀가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깜짝 놀라 고구마를 목구멍으로 꿀떡 삼키면 목에도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고 순식간에 위까지 뜨끔거렸다. 이럴 때 얼음을 동동 띄운 동치미국을 마시면 금세 오장육부가 시원해졌다. 그러면서 밤은 깊어갔다.

가족들은 매일 밤 계절이 바뀌는 소리를 들으며 고구마를 까먹었고 그 때 맛보았던 포실포실한 고구마 맛이 마흔 해가 지난 오늘까지도 혀끝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별식, 달착지근한 고구마밥

고구마는 주로 군것질로 많이 먹지만 줄기도 요긴하게 쓰였다. 펄펄 끓는 물에 줄기를 데쳐내 껍질을 벗기고 무치면 맛좋은 반찬이 되었다. 이것을 여러 채소와 섞어 밥에 넣고 척척 비비면 군침이 도는 비빔밥으로 변했다.

여러 가지 농약과 화학약품으로 기른 채소로 쌈을 싸먹고 비빔밥을 비벼 먹는 요즘 현실을 보면 그 때 그 비빔밥만큼 훌륭한 웰빙음식도 없었다.

어머니는 가끔 고구마밥도 해 놓았다. 고구마밥이라고 하면 거창할 것 같지만 실은 고구마가 전부였다. 껍질을 깎은 고구마를 쌀과 함께 넣고 밥을 지으면 푹 익은 고구마의 속살이 밥물에 스며들어 밥맛이 달착지근하게 변했다. 그러나 요즘은 한번도 이런 고구마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아내는 내가 그 당시에 먹었던 고구마밥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구마밥이란 말만 들어도 어쩐지 가난하고 허기진 사람들만이 먹는 구황식품으로 인식되어 그런 걸까. 그러나 먹거리가 풍성하게 널린 요즘에도 찐 고구마가 군것질로 출출한 배를 채워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깔 때마다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밤, 마침 소한을 앞둔 날이라 낡은 창문은 부서질 듯 사정없이 덜컹거리고 먹구름 낀 하늘에선 금세 눈발이라도 쏟아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