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오마이뉴스 2007-01-27 12:35]
담수호인데도 역겨운 갯냄새가 가득합니다. 건기인 탓에 수량이 많이 줄어든 데다 주변 마을로부터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마구잡이로 흘러드는 갖가지 오염물질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탁하다 못해 잿빛을 띠는 물에 들어가 물장구치는 아이들 모습이 쉽게 눈에 띕니다. 톤레삽 호수와의 첫 대면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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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히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톤레삽 유람선의 모습. 엔진의 굉음이 워낙 커서 배 안 사람들과의 대화가 어려울 지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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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나무판을 대충 덧대어 만든 유람선을 타고 물가에 늘어선 허름한 '초가'들과 밀림처럼 울창한 습생 식물대 사이로 난 물길을 따라 호수로 나아갑니다. 낯선 풍광이 펼쳐집니다. 한두 집도 아닌 한 마을이 서로 줄로 묶인 채 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생필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배를 수리하는 거뭇거뭇한 정비소도 있으며, 새뜻한 학교와 아이들이 공놀이하며 뛰어노는 체육관도 '떠' 있습니다. 학교의 벽에는 태극기가 또렷이 박혀 있어 우리나라에서 이곳 주민들을 위해 지어 준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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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위 마을의 학교. 이 역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데, 벽면에 태극기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지어준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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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지나가는 배 위에서 유심히 보면 집안 내부도 살짝 엿볼 수 있는데, 부엌과 방 따위의 구분도 없고 간단한 가재도구들만 벽에 걸려 있습니다. 부엌도, 화장실도 따로 없으니 난간에 기대 소변을 보는 아이 옆에서 버젓이 손을 담가 세수하는 모습도 이곳에서는 그리 보기 드문 광경은 아닙니다.
엔진의 요란한 굉음을 들으며 좁은 물길을 따라 10여분 가면 가슴조차 확 틔워주는 후련한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같은 건기 때의 호수 전체 면적이 우기 때의 그것에 견줘 고작 20%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평선이 아득합니다. 하긴 물이 바짝 마른 건기 때도 우리나라의 제주도 면적보다 넓다 하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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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배 위에서도 사람들이 생활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톤레삽 호숫가에도 지독한 가난의 풍경은 계속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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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일행을 태운 배가 호숫가 한 선착장에 닿습니다. 여느 곳과는 달리 사뭇 번잡스럽고 왁자지껄한 장터 같은 곳입니다. 어느새 불빛을 보고 나방 모이듯 호숫가 사람들이 손바닥만한 배를 저으며 몰려듭니다.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한 바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톤레삽 호수에 기댄 채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생계 수단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물고기를 잡아다 시엠립 등의 인근 도회지에 내다 파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구걸하듯 바나나를 파는 일입니다.
갖가지 음료와 과일을 파는 물 위 장터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랍시고 울타리 안에 악어떼를 풀어놓기도 하고, 허름하게나마 맨 꼭대기(그래봐야 고작 3층이지만)에 노천 스카이라운지도 갖춰 놓아 동양 최대의 호수를 만끽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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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들을 향해 부나방처럼 몰려들어 배 위 앉아 바나나를 파는 아이들의 모습. 사실상 구걸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소득원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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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위에서 내려다본 톤레삽 호숫가 주변의 풍경은 가없는 수평선이 주는 장쾌함을 얘기하기에는 사뭇 부담스럽습니다. 이곳저곳에 가난과 고통의 더께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널찍한 양푼을 타고 노 저으며 노는 아이들, "어 돌라(a dollar)"를 외치며 구걸하는 서너 살배기의 순진한 얼굴들이 이곳에도 지천입니다.
또, 팔 한쪽이 없거나 발이 잘려나간 아이들의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다 열악한 의료 시설 탓에 그런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산에 돈 벌러 갔다가 지뢰를 건드린 것'이라며 웃어 보입니다. 정말이지 안타깝다 못해 슬픈 웃음입니다.
불과 30여 년 전 인접한 베트남과 이곳이 핏빛 전쟁으로 얼룩졌던 그때 뿌려졌던 지뢰들이 지금도 다 걷히지 못한 채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의 캄보디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앞에서 마치 '좋은 곳에서 태어난' 내가 가해자인 양 느껴져 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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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건너온 태권도복이 이곳의 아이들에게는 생활복이자 새옷이다. 등에 '00초등학교'의 이름이 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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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다시 타고 왔던 배에 오르려니 낯익은 옷을 입고 있는 한 아이가 막아섭니다. 무릎 가까이 흘러내리는 품이 큰 태권도복을 입고 다른 친구들 앞에서 뽐내듯 서 있습니다. 아직 등에 '○○초등학교'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 등에서 모아서 보내진 옷가지를 이곳에서는 새것처럼 서로 자랑하며 입고 있는 겁니다.
앙코르 와트와 함께 캄보디아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는 톤레삽 호수를 나오며 동양 최대니, 어족 자원의 보고니 뭐니 하는 관광 안내 책자의 소갯글들이 얼마나 생뚱맞은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주인인 양 행세하고, 가장 중요한 그곳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배 위에 서서 무심코 둘러보니 관광객 대부분이 한국인들입니다. 저를 비롯해 '잘 사는' 나라에서,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가난한 나라에 큰 비용 들이지 않고 구경 온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오는 것이 이곳 경제에는 보탬이 될 테지만, 고급 카메라 둘러메고 선글라스 모자에 얹은 모습들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죄스럽게 여겨집니다.
이태 전에 수업 중에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계화'가 뭐라고 생각하니? 각자 그 의미를 생각한 대로 발표해 보자."
그랬더니 아이들은, 국경이 사라지고 민족의 개념이 약해지는 것이라거나, 전 세계를 제 집 드나들 듯 자유롭게 여행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 외국어(영어)가 공용어가 되어 여러 나라 사람들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등 예상했던 대로 고만고만한 답들이 나왔습니다.
톤레삽 호수의 배 위에서 현지인들의 삶을 보면서 '세계화'의 새로운 의미를 한 가지 더 건졌습니다. 학교에 돌아가 아이들에게 꼭 덧붙여야겠습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삶을 그저 가엾게 느끼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이 일정 부분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마땅히 도와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바로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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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톤레삽 호수의 석양 모습.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은 아름다운 일몰 풍광이지만 이곳에서는 왜 그리 슬프게만 느껴지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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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배에서 내릴 즈음 아쉬운 마음에 톤레삽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석양이 수면에 걸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무척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합니다. 전기도 없는 물 위 마을에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노를 저어 돌아옵니다. 해가 물 아래로 들어가 버리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올 겁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그들의 삶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오늘 톤레삽 호수 여정은 석양과 함께 갈무리되었지만, 내일 앙코르 와트 여정은 동 터오는 여명과 함께 시작될 겁니다. 앙코르 와트에서는 또 어떤 캄보디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지. 이내 '시암(태국의 옛 이름)을 물리친 도시'라는 뜻의 시엠립에 닿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그런 곳에도 사람은 어김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한 아이의 기름때 가득한 손을 보았습니다. 부모 앞에서 재롱부릴 그 나이에, 그 아이들에게도 삶의 책임이 안겨진 겁니다. 뭘 안다고... 그러다 보면 다른 세계의 아이들보다 일찍 철은 들 겁니다. 부디 그 '철'이 미움과 좌절, 낙담, 증오 따위가 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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