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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암 투병 아내 머리 염색하는 인문학자의 꿈

피나얀 2007. 2. 13. 23:36

 

출처-2007년 2월 13일(화) 8:22 [오마이뉴스]



십대 후반은 그런 것 같습니다. 주위의 누군가는 암 투병 중이거나 또는 그로 인해 가슴 아픈 이별을 나누어야 합니다. 저를 사랑하고 걱정하던 참 좋은 분이 지난 1월 폐암을 앓다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환한 표정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헌화하고 돌아선 가슴에는 아픔이 일었지만 눈물은 차마 흘리지 못했습니다.

사십대 후반은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가정은 그저 운영되지도 않고, 가장은 그저 존재로서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경제적·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특히 아이들은 그냥 크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의 그 자식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정의하기에는 아직 세월이 남은 나이입니다. 가야할 길은 아직 남아 있고, 급속한 세상 또는 주변에서 조여오는 압력에 대한 심적 부담은 커집니다. 신체(身體)의 이상 징후가 또렷이 나타나는 나이 앞에서 순응하기에는 억울하고, 반항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미덕이어서 참는 게 아니라 참아야 하기 때문에 참는 나이입니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향한 사랑고백

 
▲ 한 인문학자가 쓴 인생 이야기 <나이듦의 즐거움>
ⓒ2007 랜덤하우스

올해 초 <나이듦의 즐거움>(랜덤하우스)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책의 글들은 비슷한 연배끼리의 동병상련이면서도 삶의 지혜가 부족한 저에게 제시하는 인문학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과제가 아니고서는 책읽기를 염두에 두지 못한 삭막한 저의 삶을 잠시나마 적셔준 책이었습니다.

저자인 김경집 가톨릭대 교수(인간학)는 06학번인 저를 가르친 교수입니다. 마흔 일곱에 새내기였던 저는 지난해 1학년 동안 저자와 가정과 아내, 자녀와 교육, 세상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짬짬이 나누었습니다. 대화 도중 그의 아픔을 엿보았습니다. 스무 해를 함께 살아온 아내, 암 투병 중인 아내에 대한 사랑과 염려였습니다.

"세 번째 항암치료 때에는 큰 키에 체중이 불과 30kg이 채 되지 않는, 그야말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녀를 보고 차마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돌아서서 울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두 아이를 보면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항암제 때문에 거의 초주검이 되었을 때에는 지친 제가 깰까봐 혼자 거실에서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울면서 고통을 참던 아내…."(이 책 22쪽)

참 곱고 예쁘던 아내는 병마와 세월과의 힘든 싸움으로 인해 주름도 잡히고, 머리칼이 하얗게 바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염색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아프던 아내는 지금, 일상생활을 할 정도가 되었기에 그는 치료비로 인한 걱정과 한숨보다는 평생을 감사하며 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점만 보고 살기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어지간한 건 용서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이 나이쯤에 얻는 지혜인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아내의 머리카락을 염색하면서 서럽게 행복했던 그는 "앞으로 50년만 더 염색을 해주며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과하되 과하지 않은 욕심을 부려봅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바친 책입니다. 그러니 병마로 인해 힘겨웠을지라도 그의 가족은 행복한 가족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글이 "삶에 지친 이들과 남은 길 다잡고 길 나서는 이들에게 잠깐이나마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망합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실 철학강좌가 아니라 인생길 아픔의 시간에서 얻은 이야기이기에 희망과 아픔의 연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 김경집 가톨릭대 교수
ⓒ2007 랜덤하우스

이 책의 글들은 저자가 3년 전부터 지인과 동료 학자들에게 보낸 100여 편의 글 가운데 68편을 골라 모은 산문집입니다. 그의 글에는 까만 교복을 입고 종로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를 드나들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즐겨 읽던 40∼50대의 지난 추억이 떠올리게 합니다.

까만 교복과 엄격한 규율에 갇혀 보낸 청소년기와 두 번의 휴교를 겪으며 긴장과 불만으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대학시절,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와 좌절로 젊은 시절을 거쳐 삶의 경주에서 뒤 처지지 않아야 하는 디지털 시대에 맞닥뜨린 아날로그 40∼50대. 그는 동년배의 심정을 이렇게 웅변합니다.

"딱히 근사하게 이뤄놓은 것은 없고, 아직도 해결해야 할 책무와 가장으로서의 의무가 고스란히 어깨를 누르는 압박감은 여전하면서도, 미래의 삶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대비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삶입니다. 지금까지 앞만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온 여정들입니다. 그런데 서서히 타고 온 차에서 내려야 한다며 등 떠미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책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은 시대의 푸대접에 대한 푸념이 아닙니다. 10년 넘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2년에 걸쳐 돈을 지불하면서 미술작품을 구입한 인문학자가 풍미한 문학과 철학, 음악과 미술 등에 대한 사색과 문화에 대한 견해이며, 중년의 문턱에서도 주저하지 않는 비상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마흔 아홉 청년의 심정인 그는 나이 듦에 대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쇠약해지거나 소멸돼 가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열정으로 세상을 보는 지혜와 생의 본질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씨를 간직한 그는, 새로운 길을 향한 출발을 꿈꾸는 그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낭독하곤 합니다.

그는 이성적인 인문학자이기도 하지만 끝내는 휴머니스트인 것 같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부모 발 닦기 ▲노동 체험기 ▲유서쓰기 ▲한 끼 굶고 그 돈을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보내기 등의 과제를 내주기도 하고, 종강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시를 낭독하기도 합니다. 해마다 유서를 작성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열정적인 삶으로 인간에 대해 예의를 갖춘 인격체가 되어달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