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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 착한 내 아들이 왜 하늘나라로 갔지?

피나얀 2007. 5. 4. 16:32

 

출처-2007년 5월 4일(금) 5:30 [중앙일보]

 


봄이 왔지만 결코 봄이 아닌 아버지가 있다. 지난 2월 중순 운전을 해 가족과 함께 부친의 산소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당시 서울대 의대 재학)을 잃은 권혁일(48)씨가 당사자다. 권씨는 요즘 조인스닷컴 블로그에 '슬픈 아빠'라는 필명으로 아들의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있다. "너무나도 착하고 열심히 살다 간 순형이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 그냥 잊혀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순형 군은 경북 포항의 명문 중학교.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일기 형식으로 쓴 권씨의 글들을 추려 소개한다.

▶2월 21일

순형이는 정확히 19년11개월간 항상 기쁨만 줬다. 얼마나 지나면 내 마음이 담담해질 수 있을까. 내 곁에 있었던 19년11개월만큼 지나면 좀 담담해질 수 있을까. 그런 이후 19년11개월 정도 그동안 적어 놓은 내용을 하나하나 들춰 보면서 인생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눈을 뜨고 있는 게 괴로울 뿐이다. 이 컴퓨터의 키보드에도 아직 순형이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하다. 눈을 돌려 소파를 보면 순형이가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던 모습이, 눈을 반대로 돌려 오른쪽을 보면 식탁 의자에 앉아 아직 서툴기만 한 실력으로 기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월 23일

오늘은 순형이를 저 세상으로 보내게 했던 교통사고 때 다리를 크게 다친 순형이 엄마가 수술을 받는 날이다. 수술실로 가기 전 아내가 내게 묵주를 줬다. 사고 나던 날 순형이가 마지막으로 들고 기도했던 묵주였다. 수술이 시작된 뒤 이 묵주로 기도하는데 왠지 순형이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주 잠시 행복했다. 엄마가 순형이에게 쏟은 사랑, 그리고 순형이가 엄마에게 돌려준 더 큰 기쁨들…. 고3 때 시험을 보던 날 아침에 순형이가 등교 준비를 하며 머리를 감을 때 엄마는 옆에서 책을 읽어 줬다. 엄마는 또 매일 점심.저녁 식사를 집에서 먹이고 싶어 학교 앞으로 애를 데리러 갔다.

집에서 밥을 먹이고는 급히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순형이는 어느날 몸이 좋지 않은 엄마를 걱정해 학교에 가져간 도시락 속에 '몸 좀 어떠세요. 밥 잘 먹었어요'라는 메모(사진)를 넣어 두기도 했다. 지금도 이 메모는 집 냉장고 앞에 붙어 있다. 나중에 엄마가 포항 집에 가 메모를 볼 때 겪을 아픔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목이 멘다.

과거엔 이런 일들이 그냥 일상 생활인 줄 알았는데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지금 이 시간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벌 중 아들이 죽을 때 옆에 있던 아빠의 마음보다 더 큰 벌이 있을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면 자책감과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미쳐버릴 것 같다. 회사의 내 책상 주변은 늘 지저분하고 어수선했다. 인문.사회 분야 지식이 부족한 순형이가 사회 지도자로 성장하길 바라며 매일 신문 사설이나 칼럼 중 순형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스크랩했다.

▶3월 9일

아침에 집사람 병실에서 TV 아침 방송을 봤다.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주제로 많은 말이 오가던 중 한 출연자가 "친구들이 아이들 잘 키워서 결혼식장 들어가는 걸 보면 참 부럽다"고 했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런 꿈을 꾸며 살았었다. 이 다음에 순형이가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참 즐거웠다. 그리고 결혼식은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했던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해야지, 그러려면 순형이 각시도 성당을 다녔으면 좋겠는데 등등의 상상을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나와 아내는 소리 없이 울어야 했다.

▶3월 20일

습관이라는 것, 참 무서운 것 같다. 아침에 출근하고 잠시 '아! 오늘은 순형이에게 전화를 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가고 이내 '아! 아니지' 하는 절망감에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담뱃불이 중간에 저절로 꺼져 버렸다. 순형이가 "아빠! 담배 피우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 같아 바로 자리로 돌아왔다.

▶4월 30일


최근에 조인스 블로그에서 나를 걱정해 주는 분들이 있다.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문을 정성껏 보내주시는 분께서 오늘 아침에도 글을 주셨다. "그냥 자기 일을 계속해 나가고 나머지는 섭리(Providence)에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걸음은 신께서 옮겨 놓으십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호모 스피리투스'에서)"라는 글이다. 적지 않게 위로가 됐다.

아직도 힘들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섭리를 깨달으려 하기보다 섭리에 맡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요즘 신문지상에 아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 재벌 아버지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그리고 조인스 블로그에 "자식 이기는 부모 있겠느냐"며 맹목적인 자식 사랑과 부모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자식에 대한 글을 올리는 분도 있다. 그러나 순형이는 정말 우리 부부에게 늘 양보하며 살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