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문화일보 2007-05-22 15:32]
누구든 고개를 조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배알문. 혜철 적인선사의 부도탑으로 드는 길이다. 배알문에 들면 마음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배우게 된다. 몇해 전 기둥과 지붕을 통째로 새 것으로 바꾸면서 옛맛이 느껴지지 않아 실망스럽지만, 배알문이 가진 뜻이야 |
# 절집으로 가는 길에서 보성강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이야 익히 듣고 또 봐서 알지만, 그 섬진강에 물을 보태는 보성강에 대해서는 지금껏 알지 못했다. 보성강은 오래 전에 잃었던 ‘작은 강’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은 웬만한 강은 양편에 시멘트며 돌로 둑이 쌓이면서 수로처럼 변했지만, 보성강은 숲이 우거진 강변의 풍경이 남아있다.
초여름의 무성한 강변의 풀밭에서는 풀을 뜯던 소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길게 울면 초여름의 강풍경은 조금 더 나른해 진다. 무릎까지 오는 얕은 강물쪽에서는 고무신을 신고나온 아이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첨벙거리며 천렵을 하고 있다. 보성강변에는 이런 풍경을 굽어볼 수 있는 원두막이 곳곳에 서있다. 원두막의 바닥은 쪼갠 대나무로 짜여져 있어 바람이 솔솔 든다. 한여름 땡볕이라도 나무그늘아래 이 원두막에 눕는다면 솔솔 스미는 바람에 금세 낮잠이 들어버릴 것같다.
태안사로 가 닿는 길은 이런 아늑한 강변을 따라서 간다. 태안사의 일주문은 절입구에 있지만, 절집으로 향하는 마음속의 문은 보성강 입구에서 이미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성강을 만나면 불상이나 풍경소리가 없어도 산문을 들어선 듯 벌써 마음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 태안사로 오르는 유순한 숲길의 아름다움
태안사로 가는 숲길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유순하다’. 숲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하고, 길옆을 따라붙는 계곡은 깊어 대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절 입구부터 일주문까지 포장되지 않은 산길은 한없이 부드럽다. 초록이끼로 가득한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많지도, 또 적지도 않아 돌돌거리며 내려가는 물소리가 마치 독경소리같다. 우르릉거리며 소리를 집어삼키는 계곡 물소리를 가진 절과는 다르다. 그저 유순할 뿐이다. 누군가 이 길을 둘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걷는다면, 말소리 사이에 물소리가 깔리되 이야기는 방해되지 않을 정도다.
이렇듯 순한 산길은 걸어야 제맛이다. 가파르지 않고, 곧지 않은 길을 천천히 타박타박 걸어서 오르는 것은 태안사를 제대로 만나기 위함이다. 매표소부터 일주문까지 고작 1.8㎞. 사람들은 그 길을 ‘좀 덜 걸어보겠다’며 악착같이 차를 타고 오르지만, 그건 태안사의 아름다움을 절반쯤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길의 원형을 간직한 태안사로 오르는 숲길. |
태안사 일주문을 들어서 만난 스님에게 손을 모으고 ‘절에 이르는 길이 참 걷기 좋습니다’ 했더니, 스님은 ‘요즘은 그렇게 걸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없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보태는 말. ‘길이 좋아도 걷는 사람이 없다면, 그 길을 만나지 못하지요.’ 무슨 얘기일까. 알듯도 말듯도 했다.
# 태안사 능파각에서 걸음걸이를 생각해보다
태안사로 오르는 길에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많다.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돌아가라는 ‘귀래교(歸來橋)’, 마음을 씻으라는 ‘정심교(淨心橋)’, 세속의 번뇌를 씻고 지혜를 얻으라는 ‘반야교(般若橋)’, 깨달음을 얻어 도를 이루는 ‘해탈교(解脫橋). 하나 하나 다리를 건널 때마다 다리의 이름을 되뇌며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네개의 다리를 건너서 만나는 마지막 다섯번째 다리가 ‘능파각(凌波閣)’이다. 다리인듯 싶으면서도 정자인듯, 정자인듯 싶으면서 다리인 곳. 계곡 양쪽의 바위에 두개의 큰 통나무를 걸쳐놓고 그위에 기둥을 세워 지었다.
다른 다리는 태안사를 향하려며 모두 건너야 하지만, 능파각은 절집으로 가는 길 옆에 세워져 있어 이 다리를 건너면 암자로 길을 잘 못들고 만다.
절집에 가 닿으려면 건너지 말아야 하는 다리인 것이다. 능파각은 계곡을 건너는 목적보다는, 길 옆으로 물러나 다리 위에 걸터앉아 계곡 아래로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기위해 세워놓은 것은 아닐까.
산사를 찾아 마음을 씻을 일이 많은 사람이라면, 능파각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법하다. 길을 잇는 다리가 아니면서도 사람들을 가장 오래 머물도록 하는 셈이다. 미련도 욕심도 없이 가볍고 우아하게 걷는 신선의 걸음거리를 ‘능파’라고 한단다. 능파각 위에서 오래도록 앉아있다보면 그 능파의 걸음걸이를 닮을 수 있을까.
부드럽게 휘어진 일주문의 낮은 돌계단길. |
# 한적한 절집에서 만나야 할 것들
절집을 들어서는 일주문. 그 문으로 드는 길은 이끼가 낀 낮은 돌계단 길이다. 절집을 향해 걷는 오솔길의 끝. 돌계단 길이 살짝 왼편으로 휘어져있어 일주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리산 태안사’. 거의 일주문 앞에 당도했을 때야 고색창연한 문에 매달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태안사의 아름다움을 순서대로 점수를 매기자면, 초록 이끼로 무성한 돌계단 길이야 말로 능파각과 1, 2등을 다툴 만하다. 하지만 차를 타고 오른 사람들은 가로질러 일주문과 절집사이의 중간길로 바로 접어들어 일주문의 운치를 보지 못한다. 이 길은 눈밝은 이에게만 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태안사에는 또 누구든 고개를 조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 있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들어설 수 없는 문. 동리산 자락에 구산선문을 일으킨 혜철의 법신을 모신 부도탑으로 오르는 계단 끝에 서있는 ‘배알문’이다. 고승의 부도탑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위세당당한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도록 낮게 만든 문이다. 낮은 자리에서 서서 고되고 천한 일을 내가 하는 ‘하심(下心)’을 가르치는 문. 태안사에 배알문이 있음을 소개해준 지인은 ‘그 문을 들어서면 하찮은 미물에게도 절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문은 몇해 전에 기둥과 지붕이 통째로 바뀌었다. 나무가 썩어들어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새로 손을 봤다는데, 말끔하게 정돈된 배알문의 정취는 듣던 것보다 훨씬 못해보였다. 초라하고 허물어졌지만 진심이 깃들어 있었을, 지금은 없는 이전의 배알문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밖에….
# 상좌스님에게서 마음을 낮추는 법을 배우다
상좌 스님은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부도밭에 자란 풀들도 베어야 하고, 신도들이 바리바리 싸온 물건도 날라야 했다.
절집을 떠돌아다닌지는 7년이나 됐다지만, 정식으로 불가에 입문한지는 이제 두달 남짓. 이리저리 뛰며 땀을 뻘뻘 흘리는 스님에게 물었다. “일로써 불법을 닦는 것이냐.” 그랬더니 ‘일은 일일뿐’이라며 ‘일에 정신을 다 모아야 그제서야 법이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풀을 긁을 때도, 나무를 할 때도 정신을 모아서 ‘나무아미타불’을 왼다.
따스한 봄볕이 드는 오후,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주지 스님과 마주앉았다. ‘태안사에서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물었더니, 새벽 예불을 지켜보라고 했다. 두시간 반동안의 예불 모습을 대하고 나면, 무엇을 봐야 하는지 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스님이 태안사에서 보라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절집 여기 저기 흩어져 자라는 야생차를 덖어 만들었다는 차의 향기가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적묵당의 앞마당까지 가득 채웠다.
태안사. 세속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세도를 키워나가는 절집들과는 다른, 선방과도 같은 절집이 있다.
화려한 단청이나 수많은 연등을 달지 않고 속세를 건네다보지 않는 절집. 유순한 숲길을 걸어서 만나는 고요한 절집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보성강의 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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