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관광길 열린 ‘내금강’ 미리 가본 ‘만폭동’… “붓끝으론 다 표현할 길 없어라”

피나얀 2007. 5. 31. 18:46

 

출처-국민일보 2007-05-31 17:35

 


내금강 만폭동 계곡이 하얀 속살을 살짝 드러냈다. 짙은 녹음과 안개 사이로 흐르는 벽계수는 금강산 선녀의 옷자락처럼 눈부시게 하얀 피부의 바위를 휘감아 돈다. 물줄기는 너럭바위를 만나면 선녀의 눈동자처럼 고요한 못이 되고 끊긴 석벽을 만나면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진주알처럼 부서져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오늘부터 개방되는 내금강 만폭동 계곡을 미리 가본다.

 

'나는 청산이 좋아 들어가는데/녹수야 너는 어이하여 내려오느냐'

 

김삿갓이 표훈사 능파루에서 시 짓기 내기를 하던 선비들을 향해 읊었다는 이 짤막한 시보다 내금강 만폭동 계곡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글이 어디 있을까.

 

이중환 정철 정선 김홍도 김삿갓 최남선 이광수 정비석 등 수많은 시인묵객이 헌사를 바쳤던 금강산 내금강.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에서 "금강산의 다른 구경은 모두 만폭동 구경의 부록"이라고 단언했듯 만폭동 벽계수는 은근한 멋과 맛으로 영원의 세월을 흐르고 있다.

 

온정각에서 금강송 군락이 멋스런 한하계를 거슬러 올라 온정령 106 구비를 돌고 돌면 내금강 구역이다. 야생화로 수놓은 장안사터와 김동거사와 삼형제의 전설을 안고 있는 울소와 삼불암을 거쳐 도착한 곳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표훈사.

 

내금강 중심부에 위치한 탓에 수많은 시인묵객이 묵어갔던 표훈사는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찰이다. 본래 2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지금은 능파루 등 7채의 건축물만 남아 화려했던 옛 시절을 증언한다.

 

표훈사에서 북서쪽으로 한낮에도 어둑어둑한 전나무 숲길을 800m쯤 오르면 정양사다. 볕 바른 곳이라는 뜻의 정양사는 내금강의 47개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 헐성루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 모습과 참 정기를 볼 수 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천하 절경이라는 헐성루도 한국전쟁 때 소실돼 안타까움을 더한다. 헐성루에서 바라보는 금강산 봉우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금강산을 탐승한 시인묵객치고 이를 소재로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은 이가 없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백미로 꼽히는 '금강전도'도 헐성루에서 본 경치를 화폭에 옮긴 것.

 

표훈사에서 만천을 따라 100m쯤 오르면 내금강 금강문이 반갑게 맞는다. 돌문인 금강문을 나서는 순간 좌우의 골짜기에서 앞 다퉈 흘러내린 물줄기들이 커다란 바위들과 부딪치면서 내는 웅장한 물소리가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한다. 이곳에서 화룡담까지 약 1.2㎞ 구간이 만폭동(萬瀑洞).

'백천동 곁에 두고 만폭동 들어가니/은같은 무지개 옥같은 용의 초리/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에 잦았으니/들을때는 우레더니 와서보니 눈이로다'(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폭포가 만 개나 될 정도로 많다고 해서 '만폭'이라는 이름을 얻은 만폭동 계곡은 외금강이 남성적인데 비해 수려하면서도 우아한 여성적인 멋을 자랑한다. 비록 계곡은 길지 않지만 폭포 아니면 못이요, 못이 아니면 폭포일 정도로 계곡이 온통 폭포와 못으로 이어진다.

 

왼쪽 원통골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만천이 만나는 합수목에 이르면 두 물줄기를 양 옆에 낀 산줄기가 뻗어 내리다가 갑자기 멎어선 듯 절벽을 이룬 금강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금강대 아래의 거대한 은빛 너럭바위엔 봉래 양사언이 썼다는 '萬瀑洞(만폭동)'과 '蓬萊楓嶽 元化洞天(봉래풍악 원화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금강산의 으뜸가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신선들이 절경에 취해 세월을 잊고 바둑을 두었다는 자리에는 '사선기반(四仙碁盤)'이라는 이름의 바둑판도 선명하다.

 

금강대를 뒤로 하고 만천을 따라 계속 오르면 푸른 물이 찰랑거리는 청룡담, 관음폭포와 그 물을 받아들이는 관음담, 하얀 바위에 둘러싸인 백룡담과 영아지에 이어 그 유명한 만폭팔담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은 돌을 만나면 내닫기도 하고 뛰어오르기도 하며 받기도 차기도 치기도 밀기도 함으로써 별의별 조화를 다 부린 다음에야 비로소 노기를 진정하고 천천히 내려간다.'

 

만폭팔담을 묘사한 시인묵객 중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김창협의 글만큼 사실적인 표현도 드물다. 그는 31일간의 금강산 유람기인 동유기(東遊記)에서 "금강산을 보고 반생 동안 보았다는 산들은 모두 흙더미, 돌무더기였다고 하였더니 지금 또 여기 와서는 반생 동안 보았다는 물들은 다 도랑물, 소발자국이다"고 감탄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덟 개의 못으로 이루어진 만폭팔담은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감도는 흑룡담부터 시작된다. 흑룡담으로 흘러드는 누운 폭포를 옆에 끼고 만천을 거슬러 오르면 폭포소리가 비파 소리를 닮았다는 비파담이다. 만폭팔담의 세 번째 못인 벽파담은 못 위쪽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급한 물살이 너럭바위에 막혀 흰 거품을 토한다.

 

벽파담을 지나면 보덕암으로 가는 출렁다리 아래로 삼복더위에도 눈보라를 날리고 찬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든다는 분설폭포와 분설담이 나온다. 분설담 앞 너럭바위에 서면 동북쪽으로 법기봉의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 있고, 서북쪽으로 대향로봉과 소향로봉이 법기봉을 마주본다.

 

분설담 맞은편의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법기봉 중턱에는 높이 7.3m의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해 벼랑에 간신히 기댄 보덕암이 위태롭게 걸려있다. 단층 건물이지만 서로 다른 지붕을 얹어 3층처럼 보이는 보덕암은 바람이 불면 삐거덕거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금강대 무선대 소향로봉 대향로봉 등 만폭동을 둘러싼 봉우리와 계곡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분설담으로 내려와 만천을 따라가면 만폭팔담 가운데 가장 기세가 좋다는 진주담이 나온다. 급한 계곡물이 너럭바위의 턱을 받고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진주알처럼 부서진다. 머리를 쳐든 거북이 물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담과 못의 모양이 배처럼 생긴 선담을 지나면 만폭팔담의 마지막 못인 화룡담이 나타난다. 화룡담은 우거진 숲과 어울려 은근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다. 바위에 오르면 동북쪽으로 중향성이 멀리 보이고, 남쪽으로 지나온 만폭동의 여러 못들이 내려다보인다.

 

화룡담을 지나면 야생화 만발한 아늑한 숲길. 이곳에서 사선교까지가 백운대 구역으로 고갯마루에 서면 계곡미와 산악미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전망 좋은 곳이 '마하연'이라는 암자터. 마하연터 뒤쪽에는 촛대봉, 앞쪽에는 혈망봉과 법기봉, 왼쪽에는 중향성과 나한봉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마하연터 주변은 원시림으로 금강초롱꽃이 많은 곳.

 

마하연터에서 만폭동 계곡의 상류인 사선교까지 2㎞ 구간은 화개동으로 높이가 40m에 이르는 큰 바위 벽에 조각된 '묘길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마애불이 눈길을 끈다. 묘길상에서 1㎞를 더 오르면 사선교 못미쳐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비로봉(1693m)은 금강산 최고봉으로 일만이천봉이 모두 이 비로봉의 발 아래 있는 셈이다. 하지만 금강산 탐승은 애석하게도 비로봉을 눈앞에 둔 묘길상에서 끝난다.

 

1894년부터 네 차례 조선의 구석구석을 답사한 영국의 작가이자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만폭동을 둘러보고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다. 조선후기 시조작가 안민영도 글로써도 다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다 묘사할 수 없다는 '서부진화부득(書不盡畵不得)'이라는 한 단어로 내금강의 아름다움에 혀를 내둘렀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목욕하기 위해 날개옷을 벗기 시작하는 모습의 내금강 만폭동 계곡. 이제 그 계곡이 다시 남녘의 유람객들을 유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