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에디슨도 극찬했다는 에펠탑… 갑신정변때 세워졌다고?

피나얀 2007. 6. 21. 20:19

 

출처-조선일보 2007-06-21 08:49

 


유럽 귀족의 교육여행 '그랜드 투어'②
 
 
프랑스는 로마제국 이후 유럽 문명을 이끌어온 선두주자다. 이 땅에서 중세 봉건제가 꽃폈고 절대주의왕정이 탄생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현대사회로 가는 첫 걸음이었으며 나폴레옹은 전 유럽에 자유와 평등의 혁명 정신을 전파했다. 배움에 목마른 여행자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 프랑스는 바로 그런 곳이다.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 걸린 '루브르 박물관'
 
'랭스 대성당'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도 볼거리
 
노트르담에서 배우는 용서의 가치
 
센 강 한가운데 있는 시테 섬. 로마시대부터 파리의 중심이었다. 프랑스 대표 교회인 노트르담 성당도 이 곳에 있다. 노트르담의 멋은 고딕 양식에 머물지 않는다. 진짜배기는 이곳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용서의 미덕을 가르치기에 적당한 곳이란 사실이다.
 
주인공은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 (Henri·1553~1610). 신교도의 리더였던 앙리는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572년 이 곳에서 구교도인 프랑스 왕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평화를 위한 결혼식은 파리 시민들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신교도들을 대량 학살하면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 때 앙리는 친구와 동지, 추종자를 모두 잃었다. 다만 앙리는 왕의 친척이었던 까닭에 신교도임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앙리는 그 후 왕이 됐다. 지은 죄가 있는 파리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왕은 복수하지 않았다. 노트르담 미사에서 파리 시민을 용서했다. 그 결과 어찌됐냐고? 프랑스는 분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와 앙리 4세 아래서 유럽의 최강국이 됐다.
 
●틈새정보: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프랑스 영화 ‘여왕 마고’를 보고 갈 것. 앙리 4세의 비극적인 결혼을 다루고 있다. 단, 워낙 ‘리얼’하기 때문에 미성년자는 관람불가.
 
 
 
뒤마가 왜곡한 대정치인의 유산
 
어려운 퀴즈 하나. ‘나라 안에서는 2인자지만 전 유럽에서는 1인자’로 불렸던 사람은?’ 정답은 프랑스의 수석대신으로 절대왕정의 기초를 쌓은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1585~1642). 만약 맞췄다면 당신은 엄청난 역사 상식의 소유자다. 리슐리외는 파리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데 루브르 박물관 바로 옆에 붙어있는 팔레 루와얄(Palais Royale)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공원과 고급상가다. 단정하고 조화로워 파리 시민의 사랑을 받는다. 관광객이 거의 없어 좋다. 산책을 좋아했던 리슐리외는 이 공원을 거닐며 루이 14세 때 완성을 볼 절대왕정의 밑그림을 그렸다. 리슐리외 따라 걷기. 그럴듯하다.
 
●틈새정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악한 추기경, 삼총사와 달타냥, 왕비를 괴롭히는 그 사람이 바로 리슐리외다. 그렇지만 소설과 역사적 사실은 정반대였다는 것을 기억할 것.
 
 
 
혁명에 바쳐진 제단 개선문
 
파리의 중심인 샤를 드 골 광장에는 개선문이 서 있다. 아이들에게 황제 나폴레옹(Napleon·1769~1821)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지어졌다고만 해주면 될까. 인류의 위대한 진보였던 프랑스 대혁명에 바쳐진 제단임을 곁들여주는 게 낫다. 높이만 50m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기념물을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지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가 황제까지 될 수 있었던 건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건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폴레옹은 초년 장교시절부터 혁명을 지지했고 혁명을 지키기 위해 전 유럽과 싸웠다. 그가 혼자 싸웠나? 물론 아니다. 혁명을 지지했던 모든 사람이 함께했다. 당연하게도 나폴레옹의 승리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혁명전쟁에 동참했던 모든 이의 것이다. 개선문도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에게 바쳐진 기념물이다.
 
●틈새정보: 루브르 박물관에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이 걸려있다. 놓치기에는 아까운 대작. 센강 남단의 돔 교회에 있는 나폴레옹 무덤은 괜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새로운 문명의 상징 에펠탑
 
에펠탑은 멋지다. 조명까지 켜지면 환상 그 자체다. 이젠 파리의 상징이 돼버린 에펠탑은 1889년에 파리 만국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처음 공학자 구스타프 에펠(Eiffel·1832~1923)이 300m짜리 탑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반대는 격렬했다. 그러나 에펠은 포기하지 않았고 약속대로 탑을 완성함으로써 반대자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에펠탑을 단순한 관광명소로 생각하고 찾아오는 데 그건 정말 아니다. 이 탑은 수 천년 동안 인류를 지탱해 온 목재와 석재의 시대가 저물고 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발명왕 에디슨 역시 이 곳을 ‘위대한 아이디어의 현장’이라고 극찬했다.
 
●틈새정보: 이 거대한 탑이 우리나라로 치면 구한말의 갑신정변(1884년)과 갑오개혁(1894년) 중간쯤에 세워졌다는 것이 믿어질까. 탑 귀퉁이에 있는 에펠 흉상을 놓치지 말자.
 
 
 
그 밖에
 
파리 교외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왕정의 요람.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 거대한 궁전으로 귀족들을 몰아넣고 화려한 생활을 강요함으로써 재정적으로 파산시킨 후 왕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바스티유에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열정이 넘쳐난다. 대혁명의 원인이 루이 16세의 무능과 특권층의 탐욕 때문이라는 걸 아이들에게 꼭 알려주자.
 
사크레쾨르 성당는 몽마르트 언덕의 랜드마크.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진 후 패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전력도 모른 채 선전포고를 했다가 지고 말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항상 이긴다’는 동양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듯.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이 대대로 대관식을 올렸던 곳이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가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지켜본 곳도 바로 이 곳. 샤갈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가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