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밴쿠버는 구경할 게 별로 없는데..."

피나얀 2007. 7. 4. 20:00

 

출처-오마이뉴스 | 기사입력 2007-07-04 15:14

 

 

▲ 아침 햇살이 퍼지는 밴쿠버

 

ⓒ2007 제정길

 

가이드는 꽤 늦었다. 2000여명 되는 프린세스호 승객 대부분이 하선장(下船場)을 빠져 나가고 넓다란 건물에 우리만 남았을 때까지 그는 연락을 해오지도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나중에는 약간의 조바심이 나고, 그래서 몇몇 곳에 전화하여 여행사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마지막에 그와 통화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빨리 올줄 모르고 사무실에 있었다 한다.

배에서 내린 지 한 시간 반쯤 되었을 무렵에야 허름한 밴을 몰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가이드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우리를 담당하게 될 'K' 여행사의 가이드라 소개하고, 제대로 연락을 받지 못해 늦게 나와서 미안하다며 우리를 차에 타게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밴쿠버는 구경할게 별로 없는데, 어떻게 시간을 보내드려야 하나…."

ⓒ2007 제정길
우리로서는 밴쿠버 땅이 처음인데 '구경할 게 없는 밴쿠버'에 아침 일찍부터 오게 되어 기분이 좀 그랬다.

"뭐, 되는 대로 하십시다, 정 뭐 하면 가방만 맡아주시고 지도 한 장만 주시면 저희들이 대충 알아서 시간을 보내 볼게요."

대답하는 내 말도 크게 상냥하게 들리지는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차로 한 바퀴 시내를 둘러보고, 여행사 사무실에 가서 짐을 맡겨두고, 지도를 받아서 우리끼리 도보로 시내 구경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사이에 가이드 아저씨는 공항에 가서 새로 도착하는 팀을 인수(?) 해와야 하는 모양이었다.

▲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다는 증기로 가는 시계
ⓒ2007 제정길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시내는 한적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도시 치고는 공기도 비교적 맑았다. 차이나타운을 주마간산으로 지나고 개스타운(Gastown)에 들러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다는 증기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마약의 거리로 갔다. 마약의 거리라? 정식 명칭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가이드는 그렇게 불렀다. 그곳에선 마약의 흡입과 사고 파는 것이 어느 정도 허용이 된단다. 원 세상에나!

햇살이 훤한 대낮인데도 눈이 퀭하게 풀린 사람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마약을 하고 마약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란다. 도시의 한복판에, 그것도 대낮에 사람들 사이에서, 경찰차가 뱅뱅 도는 지역에 그런 일이 일으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안되었지만, 30여년을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거였다.

ⓒ2007 제정길
한때는 이 거리를 폐쇠시키고 철저하게 단속한 적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주택가로 숨어들고 마약만 더욱 번창하게 되어 지금 이 방법으로 도로 돌아왔다 한다. 한 곳에 모아놓고 적당한 압력으로 관리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란다.

글쎄, 사람살이라는 게 단순한 논리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귀담아 들을 만은 했다. 미아리 등의 집창촌을 철거하자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파고드는 문제로 골머릴 앓고 있는 우리나라 당국자들이 보았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밴쿠버의 압구정동이라는 랍슨가를 거쳐서 여행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랍슨가에는 젊은 동양인이 많이 눈에 띄었다. 대개가 한국인이란다. 주로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 온 대학생이거나 아니면 현지에서 학교를 다니는 유학생들인 모양이다. 이곳이 방값이 그런대로 싸고 치안도 비교적 잘 돼 있고 거기다 패션가게도 즐비하니 한국 젊은이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았다.

ⓒ2007 제정길
사무실에 가방을 두고 지도 한장을 들고 거리로 다시 나왔다. 랍슨가를 쭈욱 따라 걸어내려가다가 그렌빌가에서 좌회전을 하여 우리가 내렸던 선착장인 캐나다 플레이스 갔다가 되돌아 왔다. 생각보다 기온이 싸늘하여 반팔차림인 옷 사이로 한기가 느껴졌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자주 선정되는 밴쿠버는 지나가는 과객에게는 한기가 느껴지는 평범한 도시에 불과했다.

▲ 부두의 기능을 하는 캐나다 플레이스
ⓒ2007 제정길
길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이드의 사무실로 찾아가니 그는 세 명의 새로운 관광객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셨다는 팔순을 넘긴 노부인과 그의 대학생 손녀 두 명이었다. 노부인은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정했고 손녀들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는 하나 한국말은 거의 못 했다.

우리는 그분들과 같이 다시 시내 관광에 나서기로 했다. 잠깐 길을 나서기 전에 비용문제로 가벼운 입씨름이 있었다. '노 가이드'(알고보니 그분은 연세가 72세나 되었다)는 우리에게 6일간의 가이드 팁(1인당 하루 10불)과 식당 팁(1인당 하루 2불)을 선불로 내야 한다는 것이고 '노부인'은 내일 이후 가이드는 다른 사람이 할지도 모르는데 선불로 내는 것은 옳지 않고 더욱이 식당 팁은 식사를 하고 나올 때 내는 건데 왜 그것을 가이드에게 먼저 내줘야 하느냐고 맞섰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교편을 잡으셨다는 86세의 노부인과 캐나다 이민 생활 30여년의 세상 물정을 훤히 아는 72세의 노 가이드가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우스웠을지도 모르겠다.

▲ 노부인과 손녀
ⓒ2007 제정길
아무튼 돈은 내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관광은 속개되었다. 그러나 관광하는 동안에도 두 분은 자주 티격태격 말 싸움을 하곤 하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주변 설명을 하는 가이드에게 노부인은 그 마이크 좀 치우라고 핀잔을 주었다.

"아니 왜요? 크게 들리고 좋잖아요."
"크게 들리긴 아예 웅웅 거리고 들리지가 않아."
"할머니 귀가 가신 거예요."
"귀가 가긴, 맨 목소리는 잘 들려."
"맨 목소리로 하면 나도 목 아프단 말이에요."
"사람 다섯인데 목이 아프다면서 늙어가지고 가이드는 왜 해."
"돈 벌어야지요."
"캐나다는 노령연금을 많이 주기로 소문 났든데 연금이 적어?"
"꽤 돼요."
"그럼 그만 쉬어야지."
"쉬긴요, 하는 데 까지 일해야지요."


▲ 스텐리 공원에서 바라다 보는 밴쿠버 도심
ⓒ2007 제정길
티격태격 하면서도 차는 아침에 들렀던 곳에 다시 들렀다가 스텐리 공원으로 이동하였다.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연신 경관 설명을 하면서도 가이드의 운전 솜씨는 좋아 재빠르게 다른 차들을 따 돌렸다.

면적이 1000에이커나 되는 공원은 광활하고 쾌적하였다. 그곳에서 바다를 끼고 바라보는 밴쿠버는 아름답고 푸근해 보였다. 도심의 높은 빌딩들과 야트막한 산 등성이의 고급 주택가 그리고 바다위를 가로지르는 라이언스게이트 다리 그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밴쿠버가 살기 좋은 도시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 라이언게이트 다리
ⓒ2007 제정길
해가 아직 한발이나 남았음에도 일찌감치 관광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한식집을 찾아 들었다. 가이드 말로는 고등어 구이를 잘 하는 집이라 한다. 오랫만에 보는 김치는 반가웠고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만 하였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술값이 말이 아니었다. 와인은 잔으로는 팔지 않고 우리나라 소주는 한 병에 20불(세금포함)이나 되었다. 작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도 10불에 마셨는데 무슨 날벼락인지. 밥맛이 싹 달아날 지경이었다.

백수 주제에 소주 한 병에 20불은 너무 과하여 참았다. 여행이란 눈과 입이 즐겁자고 하는 것인데 이곳 캐나다에서는 그중 하나는 포기해야 할 모양이다. 눈물이 다 나올려고 한다. 술도 한 잔 없이 5박6일을 견뎌야 하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서울에 빨리 가고 싶어진다.

▲ 호텔 창 너머로 보이는 밴쿠버 주변의 산들
ⓒ2007 제정길
다행히 호텔은 그럴듯 하여 슬픈(?) 마음을 참고 일찍 잠들었다. 크루즈에서 공공공 울리던 배의 진동이 아직 내 등허리에서 전해지는 듯 느껴졌다. 내일은 배 대신 차를 타고 록키산맥을 향하여 달려가겠지. 여행은 아직도 진행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