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YARN™♡ 【이성(연애)】

오래된 남편의 지갑을 열어 보니...

피나얀 2006. 4. 2. 19:36

 

"산에 가자!"
"나는 못가. 일어나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도 느글거리고…. 난 그냥 좀 더 잘래."

아이들까지 쉬는 토요일. 남편은 아이들을 부추겨 동네 산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식구들이 약수통을 챙기고 모자를 찾는 소리가 몽롱하게 들렸다.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이어서 그런지 몸에 긴장이 풀리고 나른한 게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누워만 있으면 더 아픈 거라고 남편이 내 손을 잡아끌다시피 일으켜 세울 기세다.

"나 요즘 왜 그러지, 몸이 자꾸 까라지고, 아무래도 봄 타나봐."
"이 사람아, 앞으로 삼십 번쯤 봄을 더 탈 텐데 지금부터 그러면 어떡해?"

봄을 삼십 번 더 탄다니, 그럼 삼십 년을 더 산다는 얘기 아닌가. 나는 그이에게 삼십 년 더 사는 것보다 지금 한 시간 잠이 더 중요하니 당신은 아이들 데리고 산에나 갔다 오라고 했다.

남편은 잡았던 내 손을 놓고 발을 세워 보란다. 나는 누워서 뻗은 두 다리를 세웠다. 그이가 자기 발로 내 발가락 끝을 질근질근 밟았다. 발이 한결 시원해지면서 온 몸이 편안해졌다.

"정말 시원하다. 여보, 나 잠이 저절로 올 것 같아."

나는 이불을 끌어 당겼다. 눈이 절로 감긴다. 그이는 나를 딱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어이구 참 내, 마누라 대장간에 가서 다시 벼려올 수도 없구…. 나 그럼 애들이랑 갔다 올게!"

▲ 빈약한 지갑 속 풍성한 사랑(?)
ⓒ2006 한미숙
식구들이 모두 나가자 작정하고 자려고 했던 잠은 어렴풋이 멀어졌다. 요즘들어 특별한 일 없이 몸이 자주 피곤하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그냥 누워 있었다. 방 안에 널려 있는 식구들의 옷가지와 보다 만 책들을 무심히 지나치다 지갑이 눈에 띄었다. 남편의 검은색 지갑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그이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잠바주머니에 넣는 것을 얼핏 본 것도 같다.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지갑을 집어 들고 다시 누웠다. 언제인지 기억에 없지만 오래 전 남동생이 매형한테 준다고 했던 거였다. 그 전에도 남편이 쓰던 지갑이 있긴 있었겠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지갑 속사정이 뻔해서 나는 별 관심도 없었다.

손에 잡히는 감촉이 미끌하다. 나는 무심코 지갑을 열었다. 결혼하고 여태 살면서 처음으로 남편 지갑을 열어보는구나 싶었다. 그이의 지갑 속에 돈이 넉넉히 들어있으리라는 생각은 기대도 없었다. 근데 이건 뭔가? 로또와 주택 복권에 아이들과 내가 있는 사진, 그리고 접혀진 메모지.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언제 아팠냐 싶게 정신이 퍼뜩났다. 복권, 이런 건 언제 샀을까. 평소 그이는 이런 데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걸 다 샀을까.

ⓒ2006 한미숙
사진을 보고 있자니 콧등이 시큰하다. 언젯적 사진인데 이런 걸 갖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딸아이와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찍었던 사진과 일학년에 막 입학했을 즈음의 아들 아이 사진이다. 거기에 내 얼굴을 오려 붙인 모양이라니.

▲ 내 삶이 노랫말처럼 되기를...
ⓒ2006 한미숙

접혀서 구겨진 쪽지에는 노래 가사가 적혀있다. 7년 전, 시댁의 큰 조카가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때 지루한 분위기를 흥겨운 잔치로 바꾸게 한 노래였다. 남편이 조카 부부에게 늘 그런 마음으로 살라

 고 불렀던 그 노래는, 내 삶이 마르고 건조하게 느껴질 때 스스로 내리는 단비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나는 그 노랫말이 내게 전하는 남편의 고백임을 안다. 나는 사진과 쪽지, 지나간 로또 복권들을 다시 지갑 속에 넣었다. 누운 자리를 걷고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집안의 탁한 공기가 신선한 바람으로 바뀐다. 머릿속은 이미 말끔해지고 내 손은 부엌에서 곧 돌아올 식구들을 생각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송고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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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4-02 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