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통영② 흐드러진 꽃 너머 물안개 핀 섬

피나얀 2006. 5. 4. 00:22

 


연명예술촌은 통영시 산양읍 연화리의 폐교를 개조해 만든 창작, 전시 공간이다. 서편으로 다도해가 펼쳐져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작품이 된다. 날이 저물어갈 무렵, 유리창 너머 수평선으로부터 밀려드는 풍경은 말 그대로 예술이다.

 

지난해 가을 연명예술촌에 작업실을 마련한 최은란 화가는 본래 통영 출신이 아니다. 창원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다 5년 전 통영으로 옮겨왔다. 대기업에서 명예 퇴직한 남편과 노후를 보내기에 알맞은 곳을 물색하다가 통영을 발견했다.

 

"남해안 일대를 포함해 전국을 1년 가까이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통영 만한 곳이 없었어요. 이곳으로 오니까 친구들이 더 좋아해요. 절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죠."

 

통영은 일상의 짐을 벗고 자연을 화폭에 담으며 생의 후반부를 채워가고픈 화가에게 충만한 기쁨이 되었다. 작업실 창밖의 바다로부터 계절이 지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잠들어 호수처럼 잔잔한 물 위로 유성이라도 떨어지면 그저 탄복만 이어갈 뿐이었다. 해질녘 풍경은 매일 달라졌는데, 하늘의 색과 바다의 빛깔이 포개져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물감을 아무리 정밀하게 혼합한다 해도 형용해낼 수 없는 색감이었다.

 

통영대교로 이어진 산양읍(미륵도) 일주도로는 부부 동반으로 즐겨 찾는 드라이브 코스다. 운전대는 늘 남편에게 맡긴다. 그리고 반드시 시계 반대방향으로 섬을 돈다. 왕복 2차선의 바깥 차선을 타야 창밖 다도해 풍경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면 달아공원, 통영수산과학관 등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차를 세운다.

 

산양일주도로에서 혼자 운전하는 것은 음주운전보다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다. 운전을 하다보면 도대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될지 정신이 혼미해질 경우가 많다. 먼 바다에 물안개로 덮인 섬들이 구름처럼 흘러가고, 길섶으로는 계절 따라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통영과 사랑에 빠진 화가는 질 좋은 해산물을 또 하나의 매력으로 꼽았다. 옛 기록을 봐도 이곳의 해산물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진상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바닷물이 맑아 굴이 참 맛있어요. 봄에 잡히는 도다리에 쑥을 넣어 끓인 '도다리 쑥국'도 맛이 기가 막히고요. 복어랑 장어도 좋고, 가을엔 전어가 또 얼마나 맛있다고요."

 

흔히들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고 하지만 물밑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서해안은 갯벌이 넓게 포진해 펄 맛이 강하고, 동해안은 깊고 수초가 없어 감칠맛이 적다. 그에 비해 남해안, 그 중에서도 통영 앞 바다는 물이 맑고 수심이 적당해 플랑크톤과 수중식물이 풍부하다.

 

또 섬과 암초가 많아 파도가 높게 일지 않기 때문에 고기들이 놀기에 좋다. 먹잇감과 숨을 곳이 지천이니 사방 각지에서 고기들이 몰려든다. 그 중 몸통이 납작한 볼락은 통영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생선 중 하나다. 석쇠나 프라이팬에 구워 상 위에 올려놓으면 가장 먼저 사라진다.

 

통영의 이름은 통제영(統制營)에서 유래했다. 임진왜란 이후 제6대 통제사가 삼도수군통제영을 두룡포(통영의 옛 이름)로 옮기면서부터다. 조그만 포구에 통제영이 들어서자 그 휘하에 여러 기관들이 설치되고 독특한 군영문화가 생겨났다. 통제영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생산해 납품하는 12공방이 갖춰지자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12공방은 통제영 초기에는 군수물자 위주로 운영됐지만, 평화시대가 지속되면서 일상 생활용품을 주력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갓과 장롱, 소반, 화장대, 부채, 신발, 장식품 등이었다. 생산은 유통과 소비로 이어졌다.

 

조선팔도 각지의 객주들이 통영에 선을 넣었고, 수많은 장사치들이 육로와 물길로 통영을 찾았다. 통영으로 돈이 모이고 성내 살림살이가 넉넉해지자 광대(예인)와 시인 묵객이 또한 찾아들었다. 바야흐로 한양 못지않은 번영과 예술이 꽃을 피우게 됐다.


약 300년을 유지해온 통제영은 개화기에 신식군대가 편성되면서 1895년 폐영을 맞이한다. 통영의 화려한 날이 저물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통제사를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 진주해왔다. 일본이었다. 다도해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확인한 일제는 통영에 어업기지를 설치했고, 그것이 통영을 경제적으로 떠받쳤다.

 

통영이 일제의 수산업 전진기지가 되자 대규모의 일본인들이 유입됐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서구 문물이 물밀듯 들어왔다. 1914년 원각사에 이어 두 번째로 근대식 극장 봉래좌(蓬萊座)가 통영에 세워졌다. 가부키와 무성영화, 악극 등 다채로운 공연이 무대에 올려졌다. 통영 사람들은 경성(京城) 못지않은 선진문화의 세례를 받게 됐다.

 

바다는 그렇게 통제영의 설치부터 일제시대까지 통영을 살찌운 바탕이 되었다. 쪽빛 바다 위에 사금파리처럼 섬들이 점점이 박힌 다도해는 통영이 낳은 수많은 예술혼의 원형질을 형성했다. 섬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아늑한 통영 바다의 정서와 질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벽 안개가 뭍으로 올라오기 전 다도해에 나가 귀를 기울이면 밤새 내려앉은 별들의 수런거림을 들을 수 있다.

 

 

▲찾아가는 길

 

대전에서 진주를 거쳐 통영까지 이어진 대진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통영까지 4시간 안팎이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항공편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서울(김포공항)-진주(사천공항) 구간을 매일 4회 운항한다.

 

통영시 관광진흥과 ☎ 055-645-0101, 관광안내소 ☎ 055-650-5375~8,

http://tour.tongyeong.go.kr

 

 

 

 

 

 

 

사진/이진욱 기자(cityboy@yna.co.kr), 글/장성배 기자(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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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2006-05-03 1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