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YARN™♡ 【음악·영화】

다른 인간관계가 존재한다

피나얀 2006. 5. 24. 21:17

 

 


<가족의 탄생>은 언뜻 보기에도 ‘정상적인’ 가족의 경계에 서 있는 여성들의 공동체를 그린 여성영화 같다. 세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시작부터 차분하거나 발랄하거나 따뜻한 여성을 비추고 있다.

 

분식집에서 여학생들의 장난을 받아주며 일하는 ‘노처녀’ 미라(문소리), 면접시간에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바카스를 건네주며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관광가이드 선경(공효진), 그리고 기차 옆자리에 앉은 경석(봉태규)에게 순진해 보일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채연(정유미). 이들의 시작은 평범하되 결말은 그렇지 않다. 이들 여성들의 삶은 우연과 필연으로 얽히면서 다채로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영화를 그저 다양한 층위의 여성들이 등장하는 여성영화라고만 부르면 아쉬울 것 같다. <가족의 탄생>은 생생한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이 성공은 가장 밀접한 인간관계일 수밖에 없는 가족관계, 연인관계, 친구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유지되고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면밀하게 관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라와 무신(고두심)이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일단 감정선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이야기다. 크고 넓은 집을 혼자서 관리하며 살아가는 미라에게 어느 날 연락이 끊겼던 동생 형철(엄태웅)과 그의 애인 무신이 찾아온다.

 

형철은 무엇이든 허허 실실 웃음으로 넘겨버리면서 무책임하게 구는 반면, 나이 많은 형철의 애인 무신은 눈치가 빠른 데다 미라의 기분을 잘 맞춰주면서도 할 짓 다하는 ‘고단수’다. 미라는 그런 무신이 불편하고 싫지만 서서히 정을 느끼게 된다.

 

사실 무신에 대한 미라의 불편함과 거리감은 상식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하다. 미라에게 있어서 무신이란 존재는, 갑자기 일상에 침입해 들어와서 밤마다 동생과 섹스를 하는 바람에 잠을 못 이루게 하는데 눈치는 빨라서 트집 잡기도 어렵다.

 

그래서 미라는 무신에게 정을 주고 싶지 않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오는 만큼 주는 관계로 통제하고 싶은 관점이다. 형철과 무신에게 화가 난 미라가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서 무신이 변기에 버린 담배를 들여다보며 물 안 내려간다고 화풀이할 때, 눈치 빠른 무신이 뛰어 들어와서 변기에서 담배를 집어 들며 ‘물 안 막힌다’고 웃으면서 답하는 그 순간은, <가족의 탄생>에서 가장 재치 넘치는 장면이다.

 

미라의 예상을 매번 깨고 끈질기게 다가오는 무신에게, 미라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계산에 근거한 미라의 인간관계 맺기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전남편의 아이인 채연이 찾아오는 바람에 무신이 떠나자, 남은 미라는 무신처럼 담배를 피우며 대청마루에 앉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가족관계란 개인이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관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음을 그려내면서 눈물샘을 자극한다. 생기 넘치고 발랄한 관광가이드 선경은 어머니 매자(김혜옥)를 지나칠 정도로 미워한다.

 

어머니는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경석)까지 두고 미군을 상대로 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선경은 한국을 완전히 떠나는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면서도, 어머니와 그 애인이 있는 가게에 자주 찾아가서 그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툭툭 던진다.

 


선경의 입장에서는, 어머니 매자가 자신을 충분하게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워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수학공식처럼 풀리지 않는다. 각자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애정을 쏟는 만큼 받는 공평함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경은 의식적으로는 어머니를 미워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하게 미워하지도 못하고 마음을 열고 좋아하지도 못한다. 선경은 시간이 훨씬 흐른 뒤에야 자기 방식대로 상대를 끈기 있게 사랑해주는 또 다른 인간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너, 변했어.”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이 영화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다. 각 인물들은 타인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 마다 이런 대사를 친다. 그리고 이런 대사가 나오면 으레 관계가 끝나리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가족의 탄생>에서는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 끝날 듯 하다가도, 밥을 먹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등 일상적인 행위를 거치면서 관계는 새롭게 변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이 완벽하게 다른 연인이 서로에게 매번 실망하고 상처 입으면서 익숙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채연과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경석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연인이 된다.

 

그런데 둘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이 완벽하게 다르다. 채연은 쉽게 돈을 빌려주고, 상갓집에서 일을 도맡아 하며,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를 챙기느라 애인과의 약속을 잊는, 속이 없어 보일 정도로 선량한 인물이다.

 

반면 경석은 자기 세계가 분명하고, 애정표현을 웬만하면 하지 않는 인물이다. 경석이 보기에 채연은 애정이 너무 헤프고, 채연이 보기에 경석은 매정하다. 사실 둘은 불안한 유년시절을 보낸 까닭에 손의 양면과도 같은 모습이다.

 


이들의 관계는 끝날 듯 하면서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선경이 어머니 매자에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다가도 아이의 유치원 숙제를 같이 하자는 매자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이는 것처럼, 경석과 채연 역시 날카롭게 부딪치다가도 일상적인 행위들을 함께 하면서 잠잠해진다. <가족의 탄생>은 세 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각 인물들의 관계를 하나의 가족으로 매듭지으면서, 그럴듯한 여성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영화 후반부에서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 긍정적인 색채가 입혀진 돌출적인 장면들이 있어서 아쉽지만, 일상적 관계가 형성되고 변주되는 과정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놓치기 쉬운 인간관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가족의 탄생>이 거둔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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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출처-[일다 2006-05-24 0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