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세계일보 2006-06-2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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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건 가까이서건, 등대가 보이면 좀 마음이 놓인다. 등대가 등대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느냐 여부는 문제 되지 않는다. 등대가 시야에 들어서는 순간 포구의 그림이 완성되는 느낌에 젖어 들게 된다. 그렇게 느끼는 것, 그게 사람
심리인 모양이다.
시인 임영조는 ‘오이도’에서 ‘늙은 주모가 칸데라 불빛 쓰고/ 푸지게 썰어주는 파도 소리 한 접시/ 소주 몇 잔 곁들여 취하고 싶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 하고/ 가슴속에 묻어둔 여자 같은’ 곳이라고 오이도를 노래했다.
오이도를 가기 전에 선입견을 갖게 만드는 시구이지만, 사실 바닷가에 관한 글의 50퍼센트는 ‘낭만’에서 빌려온 일종의 허위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늙은 주모가 푸지게 썰어주는 파도 소리 한 접시’. 시와 상상력 속에는 존재하지만 실제 오이도에서 이런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그걸 모를까.
그걸 알면서도 오이도 해변의 방파제 앞에 길게 늘어선 횟집, 조개구이집들을 보면 ‘늙은 주모가 푸지게 썰어주는 파도 소리 한 접시’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빠지게 된다. 역시 인간을 움직이는 낭만 기제가 작동한 때문이다.
오이도는 지하철 4호선의 오이도역에서 1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잠깐 산책하고 돌아서면 오이도의 본 모습을 봤다고 말할 수 없는 바닷가이다. 필자는 선착장 입구에서 함초(지구상에서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식물로 불리면서 온갖 미네랄의 보고로 평가된다.
칼슘은 우유보다 7배가 많고, 철은 김이나 다시마의 40배, 칼륨은 굴보다 3배가 많다)를 다듬어 파는 노파의 좌판 옆에 앉아 썰물 때를 기다렸다. 좌판 옆 간이 탁자에는 노파의 지인들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노파가 양념을 해서 내온 함초는 너무 짰다. 짜다고 불평을 늘어놓자 노파는 함초를 더 얹어주었다.
“내 나이가 일흔 다섯인데, 어려서부터 함초만 먹고 자랐어. 먹을 게 있었어야지. 그랬는데 머리도 안 빠지지, 늙지도 않지. 알고 보니 이 함초, 보약만 먹고 자란 거야.”
야외 탁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이재건 옹이 갑자기 함초 자랑에 힘을 쏟고 나선다. 안산이 고향이라는 그는 어렸을 적 함초를 ‘남은재’라고 불렀단다. 먹고 먹어도 남아 도는 게 함초라서 ‘남은재 남은재’ 했다는 것인데, 그 덕분에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를 열 살, 스무 살 아래로 본다는 게 이재건 옹의 자랑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75세라고는 하지만, 그는 어느 모로 보나 60 안팎의 나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젊어 보인다는 말에 이 옹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렇지? 이빨 머리카락, 이 나이에도 내 몸의 모든 게 자연산이여.”
만복을 타고난 이재건 옹 때문에 함초 자랑이 길어졌지만, 오이도 선착장 앞에서 한두 시간 서성이다 보면 이런 풍경은 쉽게 만난다. 외지 상인들보다 오이도가 고향인 상인들이 많다 보니 말문만 트이면 이내 생선 자랑, 음식 자랑, 자식 자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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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에서 함초를 손질하고 있는 노파. 함초도 팔아야 하고, 술도 한잔 해야 하고. 오이도 선착장에서 꽤 바쁜 축에 속한다. |
선착장으로 배가 들어온다. 사람들이 뱃전으로 달려가 흥정에 나선다. 횟감도 사고, 조개도 사면서 핏대 올리며 흥정하는 것은 사실, 깎아야겠다는 생각에만 집착해서는 아니다. 흥정의 재미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순둥이 같은 목소리로 흥정에 나서 봐야 그 흥정의 끝은 뻔해서 ‘안 팔아요’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목소리를 높이면 기싸움에서도 이기고 물건도 싸게 살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런 흥정의 정겨움이 살아 있는 곳 역시 오이도 선착장이다. 그렇게 산 생물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사람들은 해변 상가를 찾아들어 초고추장과 상추 앞에 앉는다. 이 수고로움을 감당하면 횟값도 절반, 조개구이값도 절반으로 해결할 수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한다. 작은 배들이 밑창까지 드러내고, 갯벌 생물들이 작은 구멍 사이로 들락거리면서 오이도는 어느새 서해 갯벌의 역동성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볕은 뜨겁지만 방파제에는 벌써 횟감을 싸들고 돗자리를 펼친 사람들이 적잖다.
오이도의 일몰 무렵을 놓치기 싫어서 아예 방파제에 진을 치고 더위와 맞장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오이도의 일몰 무렵을 가장 황홀하게 맞을 수 있는 곳은 등대이다. 오이도의 명물로 등장한 등대는 뱃길을 비추는 대신 ‘저녁노을 전망대’란 이름으로 오이도의 장엄한 일몰 풍경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필자 역시 ‘저녁노을 전망대’ 층계를 밟고 위로 올랐다. 전망대는 일반 건물의 6, 7층 높이. 원형으로 설계돼 있으니 오이도의 시내 풍경과 일몰의 바다 풍경을 골고루 볼 수 있어 좋다. 입장료가 없는 것도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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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도의 명물로 등장한 등대 모양의 ‘저녁노을 전망대’. |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전망대 입구 마루판에서는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포즈를 취하고 있고, 바다를 향해 놓여 있는 벤치에는 젊은 연인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 손놀림을 하기에 바쁘다. 그들 사이에는 배달시켜 온 피자 한 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어른들은 지는 해가 더 뜨겁다는 말로 석양의 중의성을 말하곤 했다. 그 말 역시 맞다. 석양을 한동안 마주하고 있다 볼을 만지면 ‘익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 뒤늦게서야 그 사실을 알아채는 것일까. 천천히 달구어지는 것의 위력을 간과한 때문이기도 하고, 일몰의 장엄함에 정신을 빼앗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오이도의 일몰 역시 그런 풍경을 자주 연출한다. 시화호와 바다를 동시에 거느린, 그래서 인공미와 자연미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오이도 일몰의 이미지가 별도로 존재한다.
바다가 검게 물들면 방파제 이켠의 상가가 불빛을 밝힌다. 다시 찾아온 오이도의 활력을 확인하는 순간인데, 이게 다 시화호의 생태계가 복원되면서 바닷물이 맑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 오이도를 찾는 이들은 점점 줄어 상인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였지만, 이제는 최소한 그런 위협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났다는 게 정설이다.
저녁노을 전망대에서 내려와 상가와 바다 사이의 방파제에 서 본다. 자전거를 빌려 시화 제방도로를 달려보고 싶지만, 왕복 24㎞를 오가는 내내 페달을 굴려야 하는 일은 아무래도 더 젊은 사람들의 몫인 것 같다. 함초 한 접시를 더 먹을까, 고개를 기웃해 보니 좌판을 거두고 선착장을 떠난 모양인지 노파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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