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2006년 7월 2일(일) 오후 4:01 [레이버투데이]
한때는 ‘산업역군’으로 불리며 이 나라 대한민국의
든든한 기둥이었던 이들이 있습니다. 고속도로,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도 이들의 손을 거쳐 태어났지만, 이들에게 남은 것은 갈수록 늘어가는
‘빚’뿐입니다. 얼굴 가득 굵은 주름과 구리빛으로 그을린 피부가 20년간 건설현장에서 살아온 그들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이들이
건설한 ‘대한민국’은 이들의 ‘노동’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습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3일 대구경북건설노조의 파업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오십 고개에 맞닿은 늙은 노동자의 삶을 소개합니다.<편집자주>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 지천명(知天命).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나이인 쉰의 나이에 건설노동자들은 여전히 세상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돈 버는 게
성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젊었을 때부터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빈주머니 속 먼지뿐이다.
올해
나이 49세 김진용씨는 20여년 망치질을 해 온 목수다. 23일째 계속되는 파업으로 며칠전 일하던 건설현장에서 결국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할 수 없지, 아들놈 휴학시키고 군대나 보내야지, 우리가 언제 애비 노릇, 서방 노릇 제대로 해 본 적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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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은
안전화, 굵은 주름살의 닮은 그들의 모습과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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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을 모르겠다
충북
청원군 내수면에서 태어난 까까머리 진용씨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다녔다.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 그는 집에서 돈을 빌어
음료 도매를 시작했지만, 스무살 그에게 세상이 만만치는 않았다. 사업도 물리고 빚까리 한다고 군대가기 직전까지 그가 한 일이 건설현장에서 목수들
쫓아다니면서 1년여간 데모도(조공) 생활이었다.
“빚만 갚겠다는 생각으로 잠깐 있었던 거지, 평생 망치 잡고 살게 될 줄은 그때
생각도 못했거든." 새벽같이 일어나, 흙먼지 마셔가며 뙤약볕에 일하는 ‘고통’을 다시 겪게 될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침 ‘퉤’ 뱉고 다신
여기에 발 디디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던 그다.
군대 제대하자마자, 또래들이 하는 것처럼 서울로 왔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할
수 있는 게 장사밖에 없었고 그나마 쉬워 보이는 분식가게를 냈다. 8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주머니에 구멍이 났는지 자꾸 빚만 늘어갔다.
“서울서는 살 엄두가 나질 않더라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바삐 돌아가는 서울 생활이 엄두가 안나는거야, 결국
분식가게 엎고 나서는 숨을 곳을 찾게 되더라구."
진용씨가 세상을 피해 숨은 곳이 대구였다. 한참 세상에 맞서 싸울 나이에 그는
2~3년을 손을 놓고 살았다. 이십대 후반, 대구 반야월(안심4동) 근처 시장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만난 곳이 건설현장이다.
“1년여 데모도 생활한 것도 경력이라고 건설현장으로 뛰어 든 거지, 그래도 몸만 건강하면 이 동네서는 먹고 살 수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90년대 초반이면 한참 경기 좋을 때잖아."
좋았다. 1년여 열심히 망치질 하면서면서 7살 아래 아내도 만나고,
아들도 낳았다. 목수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선 10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철사똥가리(공사장 곳곳 튀어나온
철사)에 살이 패여 피가 나도 닦을 생각 않고 일했다. 실력이 안되면 몸으로 때우자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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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선명히 쓰인 붉은 마스크, 그들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의 전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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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과하면 노동이다
말
그대로 별 보고 나와서 별 보고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아내와 아이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옷을 입고 나와서 오후 늦게 집에 들어오면 고꾸라지듯
잠이 들었다. 그래도 진용씨는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 ‘운동이 과하면 노동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열심히 일했다.
서른살 중반, 그는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예전에 자취했을 당시 연탄가스를 맡았던 후유증인지 그는 13개월 동안 약을 먹어야
했다. 벌어놓은 돈 다 까이고 계단 세 개 이상을 오르지 못했다. 아내의 뱃속에 들어 있던 둘째 아이도 유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진용씨를 받아줬다. ‘같이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말이다. 비록 남들보다 1/3밖에 일을 못하지만
그들의 배려가 없었으면 진용씨의 삶은 더이상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뒤로 진용씨의 떠돌이 삶이 시작됐다. 김천으로 문경으로, 점촌, 울산,
부산….
떠돌이 삶이 계속되면서 단칸방 달세방이 비록 지하실이긴 하지만 방 두칸짜리 전세방이 되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그리고 은행
융자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40대 초입, 진용씨는 처음으로 자기 집이라는 것을 갖게 됐다.
“건설일용노동자들은
쓰메끼리(유보임금)라고 해서 매달 일한 돈이 바로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적게는 15일, 많게는 75일씩 깔아놓고 지급되거든. 그리고 일하는
날도 들쑥날쑥하고 사실 적금이라는 것을 부었다가도 깰 수밖에 없고, 다 알뜰한 우리 아내 덕이지."
몸은 힘들었지만, 당씨
진용씨는 낚시도 다니면서 '이게 사람사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여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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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노동자의 손, 그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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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빠진 독"
1997년
건설현장에도 예외 없이 IMF 한파가 몰아쳤고 그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지런’을 몸에 달고 살았던 진용씨였기에 다행히 그의 손에서 일이
떨어지는 날은 없었다. 일당을 어음으로 받고, 일이 끝난 지 4개월만에 돈을 받긴 했지만, 하루 일당이 예전만큼 못해도, 그는 편하게 IMF를
넘겼다.
공사를 따내서 느긋이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달 뒤에 들어갈 예정인 공사가 펑크가 난 것.
급하게 알아본 곳은 부산에 있는 현장이었지만 그곳도 한달 뒤에 공사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믿었던 형님이기에 그는 또 한달을 기다렸다. 그러나
믿었던 형님이 연락이 되지 않으면서 그는 반년간 일을 구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멀긴 했지만 구미의 일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10개월간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다행히 먹고 사는데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스무살 중반에 시작했던 일을
20년간 해 오면서 똑같이 그 마음으로 일을 했는데, 참 희한하게도 IMF가 지나고 나선 손에 쥐는 돈이 줄어드는 거야. 희안하다, 희안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때처럼 열심히 살면 되겠지, 내가 조금 게을러져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거든."
아파트 공사만 했던
진용씨였다. 아파트는 지하층 공사가 조금 어려울 뿐 점점 층수가 올라갈수록 돈이 되는 공사였다. 그러던 그가 상가쪽으로 눈길을 돌린 것도
이쯤이었다. 가릴 게 없었다. 돈이 되는 거라면 무조건 해야 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었다.
아파트와 달리 상가는 탈의실조차
없었다. 새벽에야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후다닥 작업복으로 갈아입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저녁나절 시장 한복판에서 땀으로 젖은 작업복을
갈아입을 땐 창피해서 죽을 맛이었다.
문제는 아파트처럼 공사기간이 10개월씩 하는 곳과 달리 상가는 길어봤자 3개월이었다. 바로
뒷공사가 연결되지 않으면 또 손을 놓아야 했다. 결국 진용씨는 지난해 12월17일 대구에서 떨어진 경산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융자받아 장만했던
집을 팔고 200만원 사글세 단칸방이다. 그의 나이 올해로 49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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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23일째, 민주노총 결의대회에 참석한 건설노동자가 교섭소식을 담은 유인물을 보고 있다. 교섭은 답보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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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폼 넉장, 앵글 넉장이면 ‘관’ 짠다
2시간 넘게 진용씨가 자신의 삶을 담담히 이야기 한다. 그의 나이 마흔살 전셋집을 장만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고,
89년 노태우 정부가 건설 200만호 정책으로 정신없이 일할 수 있을 때가 참 좋았다.
아주 잠깐, 건설현장에서도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할 때도 진용씨는 전업할 생각을 했었다. 망치를 잡으면 잡을수록 손가락이 휘어가고 고꾸라져 잠이 들어도 자다가 보면 쥐가 나고 경련이
났다. 깜짝 놀라서 몸 살살 풀어주고 자면서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겨울 일이 없을 때도, 장마철 쉴
때도 그래서 건설노동자들은 <교차로> 보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
"이해가 안
됐지, 10년간 기능공 쫓아다니면서 망치질 배우고 또 10년간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내 삶은 자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만 하는지.
내가 올린 아파트는 하루가 다르게 높이 올라가는데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자꾸만 줄어들고 말야."
그렇게 20여년을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로 살아 왔다. 이제 쉰 고개를 넘어가는 진용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노후대책? 고용보험도 퇴직금도 없는
노가다꾼이 노후대책은 무대책이지 뭐, 건설현장 가서 유로폼 넉장이랑 앵글 넉장 가져다 관 짜서 그 안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헛헛한 웃음.
짧게 타들어 가는 담배 한 가치도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 걸음 건설일용노동자, 사실상 임금삭감이나
마찬가지 |
대구경북건설노조(위원장 조기현)가 27일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임금 20%인상이다. 형틀목수의
경우 기능공, 숙련공, 조공 등 3단계로 임금의 차이를 두고 있는데 기능공의 하루일당을 10만원으로 잡았을 때 이들은 하루일당 2만원의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
노조에 따르면 이들의 임금은 97년 IMF 이후 인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대한건설협회가 <2006년 상반기 건설업 임금실태 조사 보고서>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03년 5월 9만2천원이었던 이들의
임금은 지난해 9월 기준 9만1천원에 그친다.<표 참조> 특히 매년 물가상승률이 2~3%인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이들 임금은 삭감됐다는 말과 다름없다.
노조 관계자는 “폭등하고 있는 아파트분양 계약서에는 임금인상분이 반영돼 높은 분양가를 받지만, 정작 건설현장의
노동자 임금은 이처럼 매년 삭감돼 왔다"며 “평균 나이 47세인 건설노동자들은 하루 일당 157만원 정도를 받고 있는데 이들의 평균 부양가족
3.6명이다"고 밝혔다.
건설일용노동자들은 대부분 인맥을 이용해 많으면 20여명, 적게는 3~4명이 팀을 짜 건설현장에서
일을 수급받는다. 그러나 전문건설업체는 이들의 인원에 따라 임금을 주기 보다는 물량에 따라 도급을 주고 있다. 그 도급액에 이들의 식대 등
산재비용까지 포함돼 사실상 이들이 받는 일당이 깎이는 일은 부지기수라는 것. 정해진 도급비로 일을 하기 위해 이들은 점차 강화되는 노동강도도
감수해야 한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있지만, 전문건설업체쪽은 원청으로부터 이미 낮은 단가로 일을 받아 왔기 때문에 5%인
5천원 이상의 임금을 올려주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사태 해결의 실마리조차 풀리지 않고 있다. 현재 노조는 8시간 근로시간 기준
10% 인상을 제시, 수정안을 제출했지만 교섭은 중단된
상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