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패션】

60살, 비키니의 사회학

피나얀 2006. 7. 4. 19:12

출처-[경향신문 2006-07-04 10:18]

 

 


1946년 7월1일, 남태평양의 평화로운 산호초 비키니섬이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뤘다.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지 1년 만에 전승국 미국은 이곳에서 같은 급의 원자폭탄으로 공개 핵실험을 단행했다. 아름다웠던 섬은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프랑스엔 핵실험 못지않은 충격이 지나갔다.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 대회. 한 여성 모델이 가슴과 아랫도리만 조그만 천으로 가리고 나타났다. 1만여 관객은 당연히 경악했다.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는 나흘 전 핵실험에 빗대 재빨리 수영복 이름을 ‘비키니’라 붙이고 상표등록까지 끝냈다. 패션의 혁명이라 불리는 비키니가 세상과 첫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도전과 응전, 비키니 60년

 

그로부터 60년. 세계를 경악시켰던 비키니는 이젠 누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입는 옷이 되었다. 아가씨도 아줌마도 심지어는 임신부까지도 입는다. 뚱뚱하건 말랐건, 키가 작건 크건 당당하게 배꼽을 드러낸다. 속옷만을 입고 해변을 누비는 꼴이지만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2~3년 전부터 비키니 열풍이 불고 있다. 한때 몸매가 뛰어난 젊은 여성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젠 완전히 대중화의 길에 들어섰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얼마전 ‘비키니 60년’ 기사에서 영국 여성들은 매년 비키니 수영복에 4천5백만파운드를 쓰고, 프랑스에서는 비키니가 여성 수영복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도 ‘야외용 수영복’으로는 9대 1 정도로 비키니(비키니 위에 덧입는 스리피스, 포 피스 등도 포함)가 압도적이라는 것이 수영복 업체들의 전언이다.

 

비키니의 출발은 불안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 여성들은 발목까지 가리는 치마를 입고 수영을 했다. 다리를 드러내는 것조차 외설로 여기던 시대, 비키니의 반란에 역풍은 당연했다. ‘부도덕한 옷’이라는 바티칸의 비난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은 법적으로 비키니 사용을 금지했다. 히트를 예상하고 재빠르게 상표등록을 한 디자이너는 모델을 구하지 못해 동동거렸다.

 

이후 비키니는 10년의 잠수 시절을 거쳤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1956년 영화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입고 나와 대중들의 면죄부를 받았다. 섹스 심벌 메릴린 먼로도 뒤따랐다. 60년 미국 가수 브라이언 하이랜드가 비키니를 주제로 부른 노래가 히트치면서 비키니는 점차 대중화됐다.

 

국내엔 수영복 자체가 61년에 등장했다. (주)한국샤크라인의 전신인 백화사가 내놨던 ‘상어표 수영복’ 브랜드가 본격적인 수영복으론 최초다. 이미 세계적으로 비키니가 유행했던 시기이므로 비키니도 비슷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해수욕 자체가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시절이었다.

 

1963년 유행의 거리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매장을 낸 패션 디자이너 트로아 조(67)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미니스커트, 비키니, 나팔바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트로아 조에 따르면 처음엔 영화감독들이 촬영용으로 비키니 제작을 의뢰해 왔다. 문정숙, 남정임, 문희, 윤정희 등이 비키니를 입은 모습이 스크린에 등장하면서 패션을 선도하는 아가씨들이 만들어달라고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60년대 중후반 대학을 다닌 주부 이명주씨(60)는 “미니스커트는 다들 입었지만 비키니는 차원이 달랐다. 따가운 시선을 각오하고 입어야 하니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며 “비키니를 보는 사회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고 전했다.

 

비키니는 그후 80년대와 90년대 중반 잠깐씩 유행하며 점차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놓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변에서 원피스를 입으면 답답하고 촌스럽다”는 말이 나올 만큼 ‘야외 수영복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비키니의 재발견이다.

 

#여권 신장과 더불어 만개한 비키니 문화

 

‘그녀는 겁이 나서 탈의실에서 나오질 못했지요/ 몹시나 안절부절못하고 누가 볼까봐 겁이 났지요/ 둘 셋 넷/ 사람들에게 그녀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려 주어야지/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노란 물방울 무늬가 새겨진 비키니를 입었죠/ 그녀는 비키니를 입은 채 탈의실 안에 그대로 있고 싶었지요….’

 


60년 비키니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Bikini’의 가사를 요즘 들어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해변마다 보란듯이 활보하고 일광욕을 즐기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넘치는 이 시대와는 동떨어진 가사다.

 

‘부도덕한 옷’이었던 비키니에 대한 ‘복권’은 여성들 스스로가 몸에 대한 자유를 얻게 된 과정과 맞물린다. 여성들은 이젠 남자들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고 원피스건 비키니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패션을 즐길 뿐이다. 남자들 또한 애인이, 부인이 비키니를 입어도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한국여성연구원 김영옥 학술연구원은 2000년대 비키니의 유행을 웰빙 추세와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한다. “몸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고 하나로 관통해 보는 웰빙 바람이 불며 남자건 여자건 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다”며 “타인의 시선보다 나 스스로가 나의 몸을 통해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성향이 커졌다”고 말했다.

 

20세기의 패션사를 다룬 ‘현대패션 1900-2000’(교문사)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진다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미국의 성생활 실태를 담은 킨제이 성보고서가 발표되던 시기에 등장한 비키니 수영복은 이 시기 여성의 의식성장과 과감한 자기표현의 현시라고 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또 비키니를 히피 문화와 궤를 같이하는 반항의 상징으로 설명하는 것도 패션계에선 이미 익숙하다.

 

비키니는 더이상 야한 옷이 아니다. 길고 짧은 옷이 있듯, 비키니를 선택하는 것은 그냥 취향일 뿐이다. 비키니가 등장한 초창기엔 옷 자체에 주눅이 들었지만 이젠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입는 옷이 되었다. 예전엔 비키니에 잘 어울리는 체형을 만들기 위해 몸을 만들었다면 이젠 몸에 맞춰주는 비키니가 등장했다.

 

수영복 업체 아레나 태은지 디자인팀장은 “비키니가 배가 나온 체형을 보완하는 데에는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여성들이 많이 하게 됐다”며 “예전엔 늘씬한 체형만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을 했다면, 요즘은 체형 보완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비키니 60년. 국내에서도 기념 패션쇼가 열렸고, 원조국인 프랑스도 비키니 역사에 대한 안내서를 내놓는 등 환갑잔치가 한창이다. 달라지는 시대 속에서 60년 후의 비키니는 또 한번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