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일제의 자폭 어뢰정 숨긴 외돌개 진지동굴

피나얀 2006. 8. 17. 21:20

 

출처-[오마이뉴스 2006-08-17 10:28]

 

 

▲ 용머리 해안 곁으로 350여 년 전 이곳에 정박한 하멜의 기념선박이 있다.
ⓒ2006 이명주
밤새 살벌했던 태풍의 위력이 7월 10일 정오를 기점으로 점차 사그라들었다. 강풍은 여전했으나 비가 그친 것이 다행스러웠다. 숙소 아래로 보이는 용머리 해안과 하멜표류기념선박장에도 출입 통제가 풀리진 않았지만 전날보다 가까이 갈 순 있었다.

14년 간의 억류, 하멜표류기

한 마리 용이 누워 있는 듯한 용머리 해안 바로 곁에는 거대한 모형선박과 하멜의 조각상이 있다. 이곳은 1653년(효종 4)에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스페르웨르호가 파선된 채 정박한 곳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8월 6일자 기록에 따르면 제주 목사 이원진이 아뢰기를, "고을 남쪽에서 배 한 척이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확인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른지라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입니다"라는 내용이다.

이후 조선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이들은 14년 동안 억류되어 군역(軍役), 감금, 태형(笞刑), 구걸 등 갖은 풍상을 겪게 되었다. 1666년 9월에 야심한 밤을 틈타 살아남은 14명의 선원이 탈출하게 되는데 이 중 H.하멜이란 자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억류생활과 자신이 파악한 바에 따른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책으로 엮어 발간했다. 이것이 한국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문헌인 <하멜표류기>이다.

돌이켜보면 국익을 고려한 처사였다고는 하나, 풍랑을 만나 예기치 않게 낯선 나라를 찾아든 벽안의 선원들에 대한 조선의 처우가 과연 합당한 것이었나 의문이 생겼다. 최근 4개월간 소말리아에 억류되었다 풀려난 동원호 사건이나, 작금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일부 몰염치한 한국인의 처사 등을 떠올리면 상황의 차이는 있으나 이국인에 대한 맹목적인 배척과 무지가 근간을 이룬 듯하여 씁쓸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에 숯이? 천하절경 주상절리대

사발면과 초콜릿으로 점심을 때우고 지난밤 태풍과 사투를 벌였던 민박집을 벗어났다. 정 많은 주인 아저씨는 아직 바람이 거세니 가는 곳까지 차로 데려다 주신다고 했다. 한밤의 고립감으로 자유로이 해안길을 걷고 싶었지만 선심을 외면할 수 없어 다음 목적지까지만 안내를 부탁드렸다.

말끔해진 도로를 20여 분 달려 도착한 곳은 대포동 주상절리대였다. 서귀포 중문동에서 대포동 해안까지 3.5km에 달하는 주상절리대는 마그마가 바다에 닿았을 때 급속히 냉각·수축되면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절리란 딱딱해진 표면 때문에 밖으로 흘러내리지 못한 마그마가 사각형이나 육각형 단면의 돌기둥 모양으로 굳어졌다가 압력에 의해 균열이 생긴 것이다.

마치 숯 조각처럼 생긴 다양한 크기의 석주들이 오밀조밀 모여 절벽을 이룬 이 곳의 주상절리대는 현무암 용암이 굳어질 때 일어나는 지질현상과 그 후의 해식작용에 의한 해안 지형의 발달과정을 관찰, 연구할 수있는 지질자원으로서 천연기념물 제443호로 지정되어 있다.

깎은 듯 우뚝 솟은 주상절리대에 사나운 파도가 부딪히면서 하얀 포말과 거대한 물기둥이 솟았다 깨졌다를 반복하는 풍광이 무더운 여름날에 얼음맥주를 들이켠 듯, 가슴 속을 시원하게 채웠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천연의 절경이었다.

 

▲ 사각형이나 육각형 단면의 돌기둥 모양으로 굳어진 주상절리.
ⓒ2006 이명주

송악산 이어 외돌개, 일제 진지동굴 12개

시원스런 풍광 앞에서 간밤의 억눌렸던 마음을 씻어내고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제주도 지도를 볼라치면 해안길을 따라 마치 자연전시장과 같은 다양한 볼거리가 포진하고 있다. 직접 걸어서 각각의 진풍경을 만나는 것도 좋을 듯하여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도에서 엄지손톱만한 제주도가 실제로도 만만할 거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이정표를 잘못 이해했는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인지 5km 거리에 있다는 다음 목적지가 보이질 않았다. 길을 물어보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운전자가 반대방향으로 온 것 같다며 차편이 있는 가장 가까운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걸어온 거리의 세 배는 될 듯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슈퍼에서 산 500원짜리 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걸어온 보람도 없이 그 길을 다시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기사가 제주 명소를 읊으며 다 돌아봤냐고 물었다. 가본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다 하니 이어지는 길에 외돌개란 곳에 내려 꼭 둘러보라고 일러주었다. 확답도 안 했는데 성마른 기사는 잠시 후 외돌개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나를 남겨놓고 갔다.

 

▲ 홀로 우뚝 솟아있는 20m 높이의 외돌개
ⓒ2006 이명주
숲길을 따라 5분여쯤 내려가니 멀리 바다 한가운데 범섬이 보였다. 이를 보며 또 5분여를 내려가 외돌개 매표소를 통과하니 숲 사이로 오솔길이 이어졌다. 그 끝에는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로 유명해진 초원과 아찔한 해식절벽이 나타났다. 외돌개는 그 해식절벽과 거리를 두고 홀로 우뚝 솟아있는 20m 높이의 바위섬이었다. 이는 150만 년 전 화산폭발로 섬의 모습이 바뀔 때 외따로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주상절리대와는 또다른 이색적이고도 위엄있는 풍광이었다.

그런데 외돌개를 둘러싼 이 곳 해안절벽에는 송악산과 더불어 드라마 촬영지라는 것 외에 또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일본군이 뚫은 12개의 진지동굴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1945년 3월 12일 일본군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를 '결7호작전' 지역으로 선포하고 7만4781명의 정예병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송악산의 비행장 시설과 더불어 곳곳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이 곳의 동북쪽 절벽 아래에 뚫은 동굴 역시 그 일부에 속한다. 이 인조동굴은 일본군의 回天(회천)이라는 자폭용 어뢰정을 숨기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 일본군의 回天(회천)이라는 자폭용 어뢰정을 숨기기 위해 만든 진지동굴
ⓒ2006 이명주
해안절벽 아래에 육안으로도 보이는 동굴은 여전히 검은 입을 벌린 채 파도를 토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찾은 역사의 현장 속에서 제주도 전역에 일제의 잔재가 살아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국을 지키기 위해 식민지 국가의 영토를 최후 진지로 삼은 일본군이 우리민족을 무참히 도륙한 과거의 참상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송악산보다는 다소 상세한 진지동굴에 관한 설명이 오솔길 가운데 표지판에 적혀 있었지만 그나마도 한국어로만 표기된 낡은 것이었다. 한동안 주변을 서성였으나 안내판을 유심히 보는 관광객은 거의 없는 듯했다. 지금에 와서 송악산과 외돌개의 진지동굴들을 다시 떠올리니 왠지 내 살갗이 아픈 듯하다.

'애걔, 여기가 천지연이야?'

외돌개에서 2km 떨어진 천지연까지는 쉽게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근처에 오면 저높은 곳에서 하얀 물안개를 뿜어대며 흐르고 있을 것만 같던 천지연을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름은 자주 들어 익숙했지만 아무래도 상상과는 다른 모습인 듯했다. 외돌개에서부터 본 수녀님 일행에게 위치를 물으니 '초행길이냐'며 자신들을 따라오라 하셨다.

 

▲ 천지동 천지연.
ⓒ2006 이명주
천지연의 물이 도달하는 천지동 항구를 지나 울창한 숲길을 걸어들어가니 천지연 매표소가 나왔다. 그러나 6시가 넘은 터라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입구부터 천지연에 이르는 숲은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79호로 천지연난대림지대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곳이었다. 또한 천지연의 물 속에도 천연기념물 제258호인 무태장어가 살고 있다고 했다. 나로선 그 진가를 가늠하기 어려워 그저 평범해 보이는 숲길을 따라 걸으니 그 끝에서 천지연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의 웅장함 탓이었을까? 상상한 것보다 너무 왜소한 모습에 솔직히 김이 샜다. 제주도 하면 곧잘 언급되는 명소 중 한 곳인데 마치 여느 도심 가운데서 볼 수 있는 공원 속 풍경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있자니 나름대로 유려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폭포였다.

천지연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돌아나오는 길에 천지연 관련 게시판에 진열된 확대된 사진 한장과 특이한 전화부스였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어른 남자의 장발로 봐서는 80년대 쯤에 찍은 것으로 거의 자신의 하반신만한 엄청난 크기의 장어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또하나는 앙증맞은 하르방 모양의 하늘색 전화부스 한쌍이었다.

천지연을 다 둘러본뒤 들어갔던 곳이 아닌 다른 출입구로 나오는데 그 곳에서는 여전히 입장료와 주차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같은 장소로 통하는 두 개의 출입구가 징수 규칙을 달리하고 있어 관광지 관리의 소홀함이 엿보였다. 젊은 남녀 일행에게 다른 입구를 알려줄까 하다가 오지랖도 넓다 싶어 그냥 돌아섰다. 숙소는 천지연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허름한 모텔을 선택했다. 건물이나 시설은 낡았지만 여행객을 배려한 1층의 조리실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PC방이 있어 편리했다.

내일 이 시각이면 제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음날 여정에 대한 계획과 기대로 부풀어 있었는데 오늘은 왠지 집에 대한 향수가 짙다.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