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요리】

‘조화’로 버무리고 ‘여유’로 발효시킨 전통의 지혜

피나얀 2006. 8. 18. 18:46

 

출처-[한겨레 2006-08-17 21:03]

 

 


한겨레원형질 민족문화상징 100

 

김치


우리는 한때 김치를 배척한 적이 있다. 우리답게 요란스럽게. 김치에서 나온 기생충 알이 호들갑의 빌미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것이면 무조건 경멸해 마지않던 풍조와 궤를 같이한다. 김치 냄새 싫어하는 서구인들 비위 살피며 맵고 짠 맛을 핑계로 위암 등 각종 질환의 원인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외국인들이 낯설어한다고 전통 문화를 미개, 미신 문화로 치부했으니 의아해할 일도 아니다.

 

공동체 삶의 산물인 전통문화가 21세기 문화콘텐츠 보고로 부각되면서 김치의 의미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콩을 발효시킨 장류, 곡물·과실로 빚은 주류·식초 등과 함께 과학이 증명한 ‘인류 음식문화의 백미’로 칭송되기도 한다. 심지어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 주는 ‘의료식품’으로도 떠받들어진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도 스트레스 해소 등의 탁월한 효능을 ‘과학’의 이름으로 강조한 바 있다.

 

비위생적이라 비하한 것도, 건강 효과를 내세운 것도 과학이니, 덩달아 춤출 일은 아니다. ‘우리 게 좋은 것이여!’에 편승한 또다른 쏠림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라도 김치의 문화적 의미는 차분하게 따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김치는 조화와 융합의 발효식품이다. 김치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것들의 융합을 꾀하고 나서도 성숙의 무르익음을 기다려야 한다.

 

근래 전통문화에 주목하는 건 돈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치에 관심을 갖는 게 건강 장수에 좋기 때문만도 아니다. 과학과 발전의 이름으로 팽개친 전통 삶의 지혜에서 피폐한 자본세상, 개인주의적 삶의 대안을 꾀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김치는 조화와 융합의 발효식품이다. 우리가 버리고 온 공동체적 삶에서 확인되듯 이질적 요소들이 뒤섞여 전혀 다른 새 가치로 재탄생한 먹거리다. 배추와 소금, 고추와 마늘 등 양념들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한데 어울려 탁월한 시너지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김치는 억지 부리지 않는다. 시간이란 불가항력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김치를 ‘만든다’고 하지 않고 ‘담근다’고 한다. ‘담근다’엔 ‘삭힌다’ ‘익힌다’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삭고 익기 위한 기다림을 거쳐야만 독특한 맛과 향이 살아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며 거친 개성의 모남을 누그러뜨리고 각종 양념과 버무려 이질적, 대립적인 것들의 융합을 꾀하고 나서도 무르익음을 기다린다. 인위가 작용하지만, 완성은 시간의 흐름과 발효라는 자연의 생성변화 원리가 작용해야 이뤄지는 셈이다.

 

김치를 담그고 나눠 먹는 과정에서도 공동체적 온기는 확인된다. 옛날 김장은 모내기와 더불어 두레 품앗이의 대표적 사례였다. 김장하고 이웃 모르쇠 하기가 지금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에 유습처럼 남아 있다. 최근 외국산 김치 수입이 급증한 것도 공동체적 삶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함께의 정신’은 김치와 다른 음식과의 관계에서도 보인다.

 

아무리 좋아해도 김치만 따로 먹지는 않는다. 밥이나 고기, 하다못해 고구마, 라면이라도 함께 챙겨야지 성인병에 좋다고 김치만 먹지는 않는 것이다. 오훈채나 쌈, 비빔밥처럼 한국 음식은 “여러 맛 겹치고 한데 엉겨 조화를 이루는 데 큰 특성이 있다.” 각각의 요리를 순차적으로 즐기는 서양이나 중국 등과 다르게 모두 한 상에 차려놓고 함께 먹는다. 어느 분 지적처럼 “한국 음식은 관계의 틈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 하나, 김치야말로 퓨전음식의 모범이다. 18세기 야채 절임과 고추의 그 극적인 만남과 뒤섞임이 없었다면 오늘날 김치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질적 문화가 만나 새 문화로 거듭난 성공적 예라 할 수 있다. 세계화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충돌하는 요즘, 새로운 문화 창출을 위해서라도 김치가 보여준 좋은 선례를 유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패스트푸드에 맞선 ‘느림의 맛’

된장·청국장·고추장


김치와 더불어 발효과학의 총아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된장, 청국장, 고추장이다. 이들 역시 자연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느리게 기다리며 숙성시킨 ‘슬로 푸드’다. (영어엔 슬로 푸드란 표현이 없다. 패스트푸드를 비튼 이 말에는 햄버거 따위에 대한 비아냥, 세계화 물결에 대한 불복종의 의지가 서려 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나 산업문명 탓에 속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덫에 걸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식생활조차 조급함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자극적인 것만 찾아 우리들 심성도 점점 더 성마르게 되어간다.

 

한때 된장·고추장을 홀대했던 것은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속도와 화려함에 취해 오래 묵을수록 제 맛을 내는 이들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으니 피자와 햄버거만 좇다가 비만의 멍에를 쓰게 된 꼴이라! (하여 이제부터라도 ‘된장녀’처럼 우리 문화를 비하하는 듯한 말들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종민 전북대 교수


느림의 음식을 천천히 즐기는 여유로움은 반생태적 삶의 대안

 

물론 “발효는 과학이다!” 그러나 발효에서 보아야 할 게 영양이나 건강만은 아니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더딘 성숙의 과정이다. 무르익음을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의 심리학이다. 된장이나 청국장, 고추장은 우리 몸에 좋은 양질의 영양소를 함유한다.

 

현대 과학이 이를 앞 다투어 증명해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느림의 음식들을 천천히 즐길 줄 아는 마음의 여유로움이다. 영양제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과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발효과학의 총아들도 별 무소용인 것이다.

 

이 발효식품들의 느린 성숙을 지켜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옹기다. 옹기 또한 편리함만을 내세워 한때 플라스틱 그릇에 밀린 바 있다. 요즘 다시 건강에 좋다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더 주목할 것은 그것이 지니는 생태적 의미, 즉 스스로 숨을 쉬며 더딘 무르익음을 보장해주는 그 ‘느림의 미학’인 것이다. 옹기 자체가 흙과 물, 그리고 불이 만나 오랜 ‘성숙’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으로 속도와 편리성과는 거리가 있다.

 

편리성만을 중시하는 조급함이나 건강을 지나치게 챙기는 ‘건강염려증’이 오히려 정신은 물론 육체의 건강까지도 해칠 수 있다. 건전한 정신만이 건전한 육체를 보장해준다. 우리가 김치나 고추장, 된장 등 전통 발효식품에 주목하면서 거창하게 ‘잃어버린 공동체’ 운운하는 것도 현대 산업문명이 조장하는 반생태적 삶의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뜻일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면 망하고 순응하면 흥한다. 음식문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음식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