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연가
꽃이 피고, 그 꽃길을 걸었지요
나지막한 꽃들은 정강이를 적시고
우리, 그저 흐드러졌지요
노래로 치면
어찌 꽃만이야 하겠으나
사랑이야 남김없이 우리들 몫이니
그저, 흐드러졌지요
햇빛은 오롯이 옥수수 이파리에서만
반짝이고
꽃대궁은 꿈결인 양 슬려 다녔어요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대고 속삭였지요
…사랑한다고
- 봉평
메밀꽃밭
* 해마다 9월이 오면 강원도 평창 봉평 일대는 온통 새하얀 메밀꽃 천지가 된다. 한때 수익성에 밀려 사라지는
듯했던 메밀밭이 다시 봉평 일대를 뒤덮게 된 것은 순전히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장돌뱅이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이 한 편의
소설은 작가의 고향 봉평을 무대로 해서 태어났다. 비록 장평에 있던 가산의 묘소는 1998년 유족과 주민들 간의 한바탕 실랑이 끝에 끝내 파주의
통일공원으로 이장되고 말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의 소설과, 소설이 주는 향취를 무던히도 되살려냈다. 그 사연이 어떠하든 메밀꽃은 다시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그 소설의 줄거리야 어떠하든 연인들은 메밀밭에서 마냥 즐겁다.
On
road
영동고속도로 둔내IC - 양두구미재 -
태기산|고산야생화 - 보광휘닉스파크 - 봉평|효석문화제(9월8일~17일)/이효석생가/이효석문학관/가산공원/재래장터/흥정계곡/허브나라/무이예술관
- 대화장 - 금당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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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나라를 노니는 젊음은
아름답다. |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의 메밀꽃을 보러 가는 길은 봉평이나 대화, 아니면 진부에서라도 장이 서는 날이 좋다. 이
시골장터들이야말로 ‘메밀꽃 필 무렵’의 주무대들이다. 비록 규모도 줄어들고 옛 모습도 거지반 잃어버려 소설 속 같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강원도 산골장터의 면모를 더듬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에 하나들이다. 마침 봉평장은 2·7일, 진부장은
3·8일, 대화장은 4·9일장이므로 1과 10으로 끝나는 날만 피한다면 세 곳 중 한 곳은 넉히 둘러볼 수가 있다.
옥수수와 감자
같은 풋것들을 좌판이랍시고 벌린 할멈이나, 도무지 이런 시골바닥에서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분재화분들을 늘어놓고 긴 간이의자에 누워 늘어지게
잠만 자는 장사치나, 장터 한 구석에서 메밀전 지지는 냄새로 시장에 겨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인심 좋게 생긴 아낙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적어도
내게는 메밀꽃보다 더 토속적이고 더 탐미적이다. 어쩌다가 허름한 주막이라도 기웃거릴라치면 탁배기 한 잔에 시름을 나누는 노인네들의 담소 속에서
‘허생원’이나 ‘동이’의 후일담이다 싶은 이야기들을 엿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몇 점 남지
않은 이 낡은 풍경들은 이미 과거의 몫이고, 이내 사라질 시간들에 속한다. 장터를 벗어나기 무섭게 이국적인 팬션들이며 이물스런 건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양두구미재 아래 휘닉스파크나 흥정계곡 깊숙이 들어앉은 허브나라의 풍경은 어떠한가.
한겨울 설원을 뒤덮는 원색의 스키복 물결이나, 사시사철 허브티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아로마향 같은 정담을 나누는 젊은것들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주눅이 들고야 만다. 객기를 부려 기를 쓰고 그들 사이를 비집어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치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뒤처지기 십상이다. 이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된장남’인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