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산티아고 가는 길은 안전하다

피나얀 2006. 10. 11. 22:15

 

출처-[오마이뉴스 2006-10-10 10:21]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상당수의 순례자가 이미 짐을 꾸리고 있었다. 스페인의 태양을 의식해서인지 다들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하다. 나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침대에서 나왔다가 "으헉!"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침대 쪽으로 쓰러졌다. 허벅지부터 장딴지까지 통증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이 알이 배어도 단단히 배어 있었다.

내 위에서 자던 스요시와 주변 사람들이 다들 놀라서 "괜찮냐"고 묻는데, 억지로 웃으며 손만 저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 하는 표정으로 일어났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리가 쭉 펴지지가 않아서 구부정하게 서 있어야 하는 상황. 어떻게 걸어야 할지 막막했다.

이날의 목적지로 염두에 둔 곳은 22km를 걸어야 하는 주비리와 27km쯤에 있는 라라쏘냐였는데, 발의 상태를 보고 주비리로 결정하게 됐다.

가방을 둘러매는데, 사람들이 주비리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 거라며 나를 격려한다. 그들의 말이 고마우면서도 못내 부끄럽다. 그들이나 나나 전날 똑같은 길을 걸은 건데 혼자 아픈 척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보란 듯이 힘차게 걷기로 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 걸음을 보여주는 게 가장 확실할 테니까.

프랑스인, 한국인, 일본인이 동행하면서 처음 한 말은?

 
▲ 이른 시간, 바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순례자다.
ⓒ2006 정민호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장소는 4km 정도 떨어진 바에서다. 반가운 마음에 뭘 먹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빵밖에 안 보인다. 이런 빵 쪼가리를 먹고 어떻게 걷나 싶었지만, 이게 이곳의 방식인 것 같아서 일단 적당한 것을 하나 시켰다.

그것과 함께 밀크커피라고 할 수 있는 '카페 콘 레차'를 시켰는데 의외로 종업원이 내 발음을 알아듣는다. 그 순간, 스페인어에 소질 있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착각임을 인정하게 됐다. 계산하는데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손바닥에 다양한 동전들을 펼치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런 마당에 소질은 무슨 소질이겠는가!

바에 있는 사람이 전부 순례자들인지라 들어갈 때도 그렇고 나올 때도 인사하느라 바쁘다. 놀라운 것은 전날 한번 봤을 뿐인데도 반갑게 인사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 역시 그렇게 한다는 것. 왜 그렇게 반가운지, 정말 나 자신도 놀랍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곳에서 마이키를 다시 만나 스요시와 함께 셋이 함께 걷기로 했다. 일본인, 한국인, 프랑스인이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바를 나오면서 셋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궁금했는데, 특이하게도 시작은 동물 울음소리였다. 곳곳에 있는 소들을 보다가 고양이, 소 등의 울음소리가 나라마다 다른지 확인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놀라운 것을 볼 때 하는 말들까지 별의별 것들을 다 비교해봤다. 우리는 아름다운 길 위에서 어린애들처럼 낄낄거리며 독특한 방식으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순례자를 돕는다, 조건 없이...

다들 점심거리가 없는지라 중간에 나타난 마을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벗어나야 했다. 별생각 없이 빠졌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부르더니 그쪽이 아니라고 외친다. 이런 친절이 또 있을까?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왜 안전하다고 말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 마을마다 물 뜰 수 있는 장소가 많다. 사진 속 순례자들은 마이키와 스요시.
ⓒ2006 정민호
이리저리 헤매다가 동네슈퍼를 찾아냈는데 문이 닫혀있다. 시간은 오전 8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보니 불 켜진 집도 별로 없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움직이는 걸까? 확실히 내가 살던 곳과 다르다.

다시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들어섰는데 불쾌한 신호가 온다. 발바닥에서 보낸 것이다. 굉장히 후끈거리는 느낌이랄까? 어느새 나는 절뚝거리고 있었다. 속도가 느려지는 건 당연한 일. 마이키와 스요시에게 "니들끼리 고(go)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안 간다. 앞서 가다가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기다린다.

미안한 마음에 계속 "니들끼리 워킹하라"고 외쳤지만 내심 고마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겨우 몇 킬로미터 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안 되겠다는 핑계를 댔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 적당한 곳에서 멈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적당한 핑계는 가슴 속에 묻어둘 수 있었다.

물집보다 놀라운 것은...

 
▲ 주비리 마을 입구
ⓒ2006 정민호
정오가 갓 지난 무렵, 드디어 예쁜 마을이 나타났다. 주비리다.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에게 "알베르게!"하고 외치니, 다들 친절하게 알려준다. 문제는 언어가 스페인어라는 사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솰라솰라가 끝날 때야 확인하는 척하며 손으로 '이리? 저리?' 했는데 의외로 이게 통한다.

그렇게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양말부터 벗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양쪽 발바닥에 큼지막한 물집 다섯 개가 합창을 하면서 나를 비웃고 있었기 때문. 살면서 물집이라는 것을 단 한 번 경험했던 나로서는 당황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망연자실했다.

이론상 바늘 같은 것으로 터뜨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건 이론에 불과했다. 게다가 떠나기 전에 '설마 물집 같은 것이 생길까?' 했던 터라 그런 것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내 사정을 눈치 챘는지 스요시가 바늘을 하나 내민다. 다시 한번 귀한 도움을 받고 말았다.

 
▲ 알베르게 풍경
ⓒ2006 정민호
가벼운 마음으로 샤워실에 들어갔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마'하며 옆을 돌아보니 여자가 샤워를 하고 있다. 아뿔싸!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망신살을 만든 건가 싶어 가슴이 덜컥했다. "쏘리"하고 돌아섰는데, 이건 또 웬일? 그 옆에는 또 남자가 샤워하고 있다.

그제야 알았지만 이곳 샤워실은 남녀가 함께 쓴다. 물론 샤워하는 곳에서 옆을 보지 못하도록 그 사이에 유리막을 해놨지만, 들어가는 문도 가리는 커튼도 없던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 놀란 마음을 스요시에게 고백했더니 스요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서로 "서프라이즈!" 타령을 하는데, 이런 우리를 보고 마이키는 웃기만 한다. 동서양의 문화 차이인 듯.

 
▲ 알베르게 내부
ⓒ2006 정민호
마을을 구경하다가 먹을거리를 구할 겸 슈퍼를 찾았다. 시간은 오후 4시. 문이 닫혀 있기에 이른바 '낮잠 자는 시간'으로 알려진 '시에스타'인가 싶어서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문 앞에 앉았다.

그렇게 2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슈퍼는 도무지 문 열 생각을 안 한다. 알고 보니 스페인의 많은 가게들이 일요일이면 문을 일찍 닫는다고. 일요일이니까 쉬기 위해서라는데, 그 소리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들은 돈 욕심이 없단 말인가?

사람들과 함께 꼬르륵거리고 있는데, 전날 함께 식사했던 벨기에 부부가 아스팔트를 따라 걸어가면 꽤 괜찮은 레스토랑이 나온다고 동행하자고 권유한다. 포크와 나이프로 생선을 먹어야 했던 기괴(?)한 경험을 했던지라 나는 안 가고 물만 먹겠다고 했지만, 몸을 위해 먹으라는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절뚝거리며 따라가게 됐다.

그런 밥이 맛있어?

이곳의 레스토랑은 가격이 약간 비싼 만큼 론세스발레스와 다르게 메뉴를 선택할 수가 있다. 다행히 차림표에 사진이 있어서 선택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메뉴를 알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이번에도 외국인들이 고기 기름에다가 바게트를 싹싹 발라먹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도 모르게 "으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 사람들 정말 비위 좋네'라는 생각만 든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먹고 난 쟁반은 깨끗한데 반해 나와 스요시가 먹고 난 쟁반은 기름기가 그대로 있다. '음식물쓰레기를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오염도 줄이고, 문화체험도 해볼 겸하고 바게트를 들었지만 차마 할 수는 없고 막연하게 '욕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만 했다.

사람들이 주문한 음식들을 이리저리 관찰하는 내가 신기한지 사람들이 조금씩 먹어보라고 권한다. 외국 음식 체험을 해보라는 셈. 덕분에 다양한 음식들을 맛봤는데, 이게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마이키가 주문한 후식이 문제였다. 반갑게도 그것은 밥이었는데, 독특하게도 크림으로 범벅을 했다.

무슨 맛일까 싶었다. 그런데 먹는 순간 내 인상은 험악하게 변하고 만다. 그런 나를 보고 다들 웃는다. 그 와중에도 마이키는 그 괴상한 음식을 꿀꺽꿀꺽 잘도 먹었다. 마음속에서 서프라이즈 타령이 멈추지를 않는다.

무모한 여행의 삼일째에도 '서프라이즈'는 계속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