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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 여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피나얀 2006. 11. 22. 21:49

 

출처-2006년 11월 21일(화) 오후 4:22 [오마이뉴스]



ⓒ2006 김민수
청명한 하늘이 아니라 잿빛하늘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마 청명한 하늘이었다면 그 곳을 차마 걷지 못했을 것이다. 거리에서 바라보면 그저 아파트 빌딩숲인데, 그 뒤로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얼어붙은 저 하늘 / 얼어붙은 저 벌판 / 태양도 빛을 잃어…."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한동안 잊혀졌던 노래가 마음 속에서 꿈틀거렸다.

ⓒ2006 김민수
도대체 사람은 왜 사람일까? 재개발 붐을 타고 투기꾼들이 들어오기도 했겠지만 정말 밀리고 밀려서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이 이 곳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 아파트를 지어준들 그 곳에서 살 수 없어 딱지팔고 또 어느 달동네나 판자촌을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2006 김민수
다 무너져 내린 삶의 터전, 그 곳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따스한 방에서 코가 막힌다고 투덜거렸던 지난 밤이 부끄럽다. 아무 생각없이 먹고 마시던 물조차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2006 김민수
전기도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지만, 잿빛하늘에 쪽방이 어두워 형광등불을 밝히고 있는 그 누군가를 상상해 본다. 과연 누가 이들에게 투기꾼이요, 재개발의 이익을 노리고 살고 있는 이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정말 그런 사람이라 한들, 그렇게 만든 이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2006 김민수
그 언젠가 달동네 돌계단 골목길을 돌아돌아 올라가면서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이제 그 골목길조차도 폐허의 잔해 속에 묻혀버렸다. 그래도 그때만 해도 열심이 노력하면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하는 노랫말이 진실인 듯 들렸다. 그러나 이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뒤로 보이는 저 사각건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을 본다. 상실감, 무능력감을 느낀다.

ⓒ2006 김민수
"여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붉은 락카 글씨는 마치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 사회가 사람 아닌 것처럼 바라보는 것에 대한 항변을 보는 듯했다. 그래,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2006 김민수
오죽했으면,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았으면 이렇게라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야 했을까?

ⓒ2006 김민수
그 언젠가는 달동네 꼬마들의 시선을 한껏 붙잡았을 작은 골목길의 가게, 이름이 '늘봄상회'란다. 늘 봄날 같기를 바랬던 그들의 소망이 들어 있어 겨울을 앞둔 이 곳의 풍광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얼마나 겨울이 지긋지긋했을까? 차라리 냄새나는 여름, 모기와 싸우는 것이 추운 겨울보다는 훨씬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여름도 겨울도 아닌 봄날, 그 얼마나 기다리던 봄날이었을까?

ⓒ2006 김민수
공용화장실이 제법 번듯한 것은 그만큼 이 곳에 살던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요, 한때는 번성했던 곳이라는 증거다. 아침마다 줄을 서서 배변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 우리 다 똑같은 사람이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별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2006 김민수
모두 떠난 그 곳, 깨진 항아리는 이제 그 곳의 삶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의 상징이다. 지금도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던 것들이 하나 둘 깨어져 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져가고 있다.

겨울 초입, 그 곳에서 겨울을 나야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부디 이 겨울을 잘 이겨내시길.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자연과 벗하여 살아가다 자연을 닮은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 1, 2>, <희망 우체통>, <달팽이걸음으로 제주를 보다>등의 책을 썼으며 작은 것, 못생긴 것, 느린 것, 단순한 것, 낮은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