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아카로아, 뉴질랜드

피나얀 2006. 11. 23. 21:58

 

출처-[경향신문 2006-11-23 09:36]




아카로아(Akaroa)로 갈 때면 나는 언제나 즐겁다. 아니 그 길에 올라서면 행복해진다. 초록의 조각 보자기를 펼쳐 놓은 것 같은 초원과 언덕들 사이로 뻗어 있는 길을 달리면 세상에 별로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멀리 양떼와 검은 소들의 평화로운 시간이 달력 속 풍경으로 정지해 있다.

 

오늘따라 바람도 수풀 속에 숨었는지 고요하다. 구불거리며 언덕 길을 따라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서 푸른 땅덩어리 사이로 밀고 들어온 바닷물이 파란 하늘을 비추고 있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에 막힐 일도 없을 듯 느껴진다. 거기서 굽어 내려가는 길 끝에, 바다 위에 하얀 배들을 띄우고 있는 프랑스 마을 아카로아가 있다.

 

아카로아가 프랑스 마을로 불리게 된 것엔 아주 특별한 배경이 있다. 1838년 프랑스 고래잡이 배의 선장이 아카로아에 정착해 살려고 점찍어 놓고 사람들을 데리러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영국과 미리 와서 살고 있던 마오리 사이에 ‘와이탕기 조약’이 맺어져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이 갖게 되는 바람에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항해 끝에 프랑스인들은 유니온잭이 바닷가 언덕 위에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어쨌든 그들은 식민지로 만들진 못했지만 이곳에 정착하였고 아카로아에 오늘날까지 프랑스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게 했다. 루(Rue)라고 시작하는 프랑스식 이름의 거리엔 아직도 그때 이민자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고는 하나 아무도 불어를 쓰는 사람은 없다.

 

역사의 겹을 들춰보면 지금 이곳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근거가 있긴 하지만 내겐 그리 프랑스적 향기가 짙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단지 이 마을이 그 역사적 배경으로 외부인들에게 독특하게 보이려고 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지중해변의 프랑스 마을처럼 붉은 기와 지붕을 한 낡은 건물과 그 사이의 돌 깔린 좁은 골목이 없어도 아카로아는 아름답다.

 

아카로아는 뉴질랜드 남섬의 동해안에서 태평양 바다로 돌출된 뱅크 반도를 형성하고 있는 사화산 중 침식된 분화구에 자리잡고 있다. 화산 폭발은 6백만년 전에 멈추었고 땅은 침식당하고 바다는 분화구를 밀고 들어와 반도의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좀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장갑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반도의 남동쪽, 가장 깊고 길게 파고 들어와 먼 바다에 큰 파도가 일어도 늘 잔잔한 이 항구 주변에 옹기종기 예쁜 집들이 들어앉은 곳이 아카로아이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이 햇볕 가득 차고 평화로운 마을은 오가는 길 주변도 누군가의 말처럼 모두 ‘반지의 제왕’인 광활한 경관이다. 또한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장소와 사람들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와이너리(Winery)에 들러 현지 와인을 맛보거나, 그 지역 공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카페에서 아기자기한 도자기나 장신구 등을 구경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중에서도 주중엔 늘 문이 닫혀 있는 리틀 리버에 있는 앤틱 가게 주인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골동품 가게를 팔아 치우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곰팡이 냄새 날 것 같은 옷을 입고 마네킹 같이 시큰둥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반갑다.

 

아카로아에도 역사가 있는 옛 목조 건물이나 셔벗 같은 색깔의 작은 집에서 여러 종류의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현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들어가서 선뜻 사기보다는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다.

 

도자기나 유리 공예품, 전복 껍데기의 자개로 만든 액세서리, 아니면 프랑스에서 수입해온 장식품을 진열한 윈도를 들여다 보면서 베드 앤드 블랙퍼스트(Bed & Blackfest) 팻말이 붙은 정원에 장미가 가득 핀 집들이 있는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그러다 바닷가 주변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며 바다, 사람, 갈매기 구경을 하면서 책을 읽는 것도 아카로아에서는 참 어울리는 일이다.

 

그리고는 먼 바다로 나가는 보트를 타 본다. 바위와 화산의 언덕들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함께 그려주는 절경을 감상하고 돌고래를 만날 수 있는 이 크루즈를 선장과 그의 애완견, 그리고 영국인과 중국인 등 몇몇의 여행자들과 섞여 출발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구명조끼까지 차려 입은 테리어는 괜히 따라 온 게 아니었다. 그 강아지들은 사람들이 못 듣는 돌고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세 마리씩 짝을 지은 돌고래들이 보트로 가까이 오면 갑판을 뛰어다니며 짖어대는 덕분에, 사람들은 물 속을 맵시 있게 미끄러지던 그놈들이 물 위로 갑자기 튀어 오르는 광경을 놓칠 염려가 없었다. 기암괴석의 절벽 그늘 아래서 꼬리를 털고 있는 펭귄들이나 벽에 붙어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새들,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물개 가족들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세계로의 탐험이었다. 자연 속에서,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평소 환경보호주의자도 아니면서 괜히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슴이 뜨듯해졌다.


일찍이 거리가 비어 버리는 아카로아의 바다는 오후 햇살에 더욱 빛났다. 돌아오는 길 푸른 언덕도 그 빛깔이 눈이 아프도록 강했다. 반짝이는 물결 위에 새들과 검은 백조들이 놀고 있는 엘스미어 호숫가에서 캐러밴을 대 놓고 있는 독일인 노부부를 만났다.

 

8주간의 뉴질랜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는 부인은 그동안 모은 조개 껍데기를 손주들에게 기념품으로 주려고 한다며 모래를 털고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오늘밤은 그곳에서 캠프를 할거란다. 다음날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호수가에서 맞이할 그들의 아침이 부러워졌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던 나는 금세 욕심쟁이가 되었다.

 

▶여행정보

 

크라이스트처치 여행안내소에서 아카로아까지 매일 여러 차례 버스가 운행된다. 요금은 편도 기준 10 뉴질랜드 달러(NZ$)정도. 우편 배달차로 아카로아 주변의 경관을 돌아보는 4시간 투어(NZ$25)나 2시간이 소요되는 돌고래 크루즈(NZ$50) 등이 있고 3박4일의 트랙 워킹, 돌고래와 수영을 하는 패키지도 있다. 숙소는 유스호스텔 도미토리 $15에서부터 더블 룸이 $40인 저렴한 곳(Chez la Mer Backpackers Lodge), 고급 홈스테이까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