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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눈에도 족보가 있습니다

피나얀 2006. 12. 18. 23:12

 

출처-[오마이뉴스 2006-12-18 10:35]



▲ 도둑 눈
ⓒ2006 이형덕
아침에 눈을 뜨니, 푸짐한 도둑눈이 와 있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올 들어 세 번째 내린 눈이지만 앞의 것들이 눈이라 부르기에는 변변찮았습니다. 오늘 내린 눈을 그냥 첫눈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첫눈이라 명명하여 별다를 바는 없지만, 눈에도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멀쩡하니 달빛이 교교하던 밤에 소리 없이 내린 눈을 도둑눈이라 붙여 봅니다. 그런데 시골에 살다 보니, 그 도둑눈에도 나쁜 것이 있고, 귀여운 것이 있습니다. 밤새 도둑처럼 내려서 새벽부터 헐레벌떡 눈을 치우느라 땀투성이를 만드는 눈이 나쁜 축에 속합니다. 물론 휴가 때나 공휴일 전날 밤에 솜이불처럼 내려서 단잠을 재워 주는 눈은 귀여운 편에 속합니다.

▲ 빈 밭에 내린 눈
ⓒ2006 이형덕
그런가 하면 멀리서 찾아온 벗과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창 밖으로 사락사락 내리는 싸락눈도 있습니다. 싸락눈은 숯 같은 밤에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야 제 맛이 납니다. 그렇게 창 밖에 부딪치는 싸락눈을 바라보며, 화롯불에 데운 정종을 홀짝거리는 맛도 좋겠지요.

싸락눈 오는 밤이면 손전등을 들고 초가 추녀 밑에 잠든 참새를 잡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 먹어 본 적은 없지만, 언제고 싸락눈이 내리는 밤에 참새구이를 안주로 따끈히 데운 정종을 한 잔만 마셔 볼 참입니다.

▲ 이웃마을에 내린 눈
ⓒ2006 이형덕
아침부터 쌀가루처럼 부슬부슬 내리는 부슬 눈은 온종일 내립니다. 이렇게 내리는 눈은 며칠을 내려 마을을 황홀한 고립 속에 가두어 둡니다. 이따금 눈물처럼 추적거리며 내리는 진눈깨비가 있습니다. 미끄럽기는 함박눈보다 더하고, 대개 날이 추워지기 때문에 아침이면 빙판으로 얼어붙기 일쑤입니다. 시골에 살면서 가장 싫어하게 된 눈입니다. 넉가래로 밀어낼 수도, 대빗자루로 쓸어내기도 어려운 눈입니다.

눈이라 하면 무엇보다 함박눈이라야 합니다. 함박눈은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사이에 푸근히 내립니다. 목화솜처럼 큰 덩어리 속에 세상의 모든 잡음들을 빨아들인 듯, 함박눈이 내리는 밤은 유난히 고요합니다. 게다가 푸짐한 함박눈은 솜이불처럼 세상을 덮어 찬 바람도 잠 재워 푸근한 밤을 만들어 줍니다.

▲ 시골 눈
ⓒ2006 이형덕
서울 눈과 시골 눈도 다릅니다. 서울 눈은 내리기 무섭게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에게 쫓겨나고, 차바퀴에 더럽혀집니다. 아무리 푸짐한 함박눈도 하루가 지나고 나면 질척거리는 진눈깨비가 되고 맙니다. 이따금 한적한 공원이나 빈터에 초라하니 몸을 숨긴 채 떨고 있을 뿐입니다. 시골 눈은 푸짐하고 여유롭습니다. 며칠이고 쌓여 있을 때도 있으며, 우리 동네 진수할아버지 말씀으로는 '광대울 응달배기에 내린 눈은 강남 제비 올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다'고 합니다.

▲ 응달배기 눈
ⓒ2006 이형덕
눈에도 나이가 있습니다.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솜털처럼 날리는 눈은 아기 눈입니다. 머리에 내려앉자마자 녹아 버립니다. 제법 길에 쌓이는가 싶으면 추적추적 녹아 흐르는 눈은 사춘기 소녀 눈입니다. 발로 밟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누군가의 이름을 수줍게 그 위에 남겨 놓는 눈은 아름다운 처녀 눈입니다. 아이들이 달려 나와 강아지와 뛰어 놀고, 눈사람을 만드는 눈은 마음 좋은 쌀집 아저씨 눈입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이따금 눈이 얹힌 나뭇가지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눈은 할아버지 눈입니다. 넉가래로 밀어도 땅이 보이지 않고, 쓸고 지나가면 어느새 다시 하얗게 내려앉아 그대로 며칠이고 지켜보는 눈은 하나님 눈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스스로 멈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는 지각을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뭐라 할 사람들을 더 늦게 오도록 하는 눈입니다.

▲ 눈 내리는 밤을 홀로 지킨 전등
ⓒ2006 이형덕
어느 덧, 바쁜 나이가 되어 눈만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스스로가 밉습니다. 아궁이에서 꺼내온 잉걸불에 고구마 묻어 놓고, 마당에 푸짐히 내리는 눈을 강아지와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이형덕 기자는 남양주 물골에 살며, 보고 겪은 일들을 모아 <시골은 즐겁다>(향연) 산문집을 펴냈으며,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http://sigool.com)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