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백담사 산사에서의 하룻밤

피나얀 2006. 12. 28. 22:53

 

출처-[한국일보 2006-12-28 17:18]




산사에서의 겨울밤.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한다.
하얗게 씻으라고 펄펄펄, 당신은 누구냐고 똑똑똑

눈 쌓인 한겨울, 내설악 백담사로 가는 길은 구도의 길이다. 순백의 백담계곡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신비스러운 선경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꿈속을 거닐 듯 2시간 가량 올라서 도착한 백담사. 기와마다 소담스런 흰눈을 이고 선 절은 적막했다.

 

봄, 여름, 가을엔 산행객과 신도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백담사는 눈 쌓이는 겨울이면 오래 전(전두환 전 대통령이 찾기 이전) 조용하고 아늑했던 사찰로 되돌아간다. 용대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 6.5km 되는 길을 오가던 셔틀버스가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경내를 한바퀴 둘러본 후 종무소에 들러 하룻밤 묵을 수 있겠느냐 청을 하니 고운 미소의 법당 보살님이 방을 하나 내주신다. 방바닥은 뜨끈뜨끈했지만 창호지 바른 방문, 창문 탓에 웃풍이 세다. 아파트에 익숙해진 몸이 옛 구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반가워한다. 바닥에 누우면 등은 따뜻한데 코는 얼얼한 그 기분.

깊은 산속이라 해가 빨리 떨어진다. 산그림자로 어둑해진 오후 5시. 목탁소리가 번졌다. 저녁 공양시간이다. 된장국에 김치, 나물, 오이지 등 소박한 찬이다. 같은 밥이라도 공양이라고 하니 그 느낌이 달라 한 수저 한 수저가 조심스럽다.

식판을 깨끗이 씻어 제자리에 놓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곧 이어 종소리 퍼지며 저녁 예불이 시작됐다. 극락보전에서 들리는 목탁소리, 선원에서 들리는 독경소리. 처마에선 녹은 눈의 낙수 소리가 ‘똑, 똑, 똑’,

따듯한 구들에 누워 산사의 소리를 마냥 감상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캄캄한 어둠 속 시계를 보니 이제 저녁8시40분. 산사의 시간은 깊이도 간다.


방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나섰다. 법당에 밝힌 불빛이 창호지 문을 투과해 은은히 마당을 밝히고, 간간히 설치된 가로등 불빛이 경내 처마의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다. 음력 초승이라 달은 그림자도 안보인다. 대신 비로드 천 같은 윤기나는 밤하늘은 수많은 별들로 충만했다. 어느 책에선가 히말라야의 별은 귀로 듣는다고 했다. 백담사의 겨울 별 또한 귀로 들을만 했다.

다시 방에 들어가 주체할 수 없는 고요와 조우했다. 건넌방에 깃든 보살의 쿨럭이는 기침소리만이 간간이 정적을 깨울 뿐이다. 무거운 침묵의 시간은 길었고, 생각도 따라서 깊어진다. 무엇 하려고 이 깊은 밤을 찾아 나선걸까. 나는 무엇이고, 지금 이 시간은 또한 무슨 의미인다.

오전 6시 아침공양을 한 후 날 밝기를 기다렸다가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섰다. 이날은 동지라 모처럼 눈밭을 헤쳐가며 신도들이 몰려들 것이다. 한가로웠던 백담사의 기억에 흠집 생길라 부산해지기 전에 길을 나섰다.

산길을 따라 오세암으로 향해봤다. 매표소에서 눈 때문에 길이 통제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혹시나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백담산장 앞에 닫힌 철문이 길을 가로막는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야 어렵지 않겠지만, 비우러 떠난 세밑의 여행길. 이 또한 욕심이란 생각에 등을 돌렸다.

백담계곡을 따라 털털 내려오는데 절에서 나온 차량이 태워주겠다고 멈춰선다. 하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절 마당 한 쪽에 세워진 고은의 시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일주문을 지날 즈음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펑펑 쏟아진다. 백담사의 겨울 추억마저 다 잊어버리라고, 비운 것 조차 다 지우라고 흰 눈이 소복소복 머리를 덮고, 등 뒤의 발자국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