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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소한, 뽀드득거리는 눈길을 나서다

피나얀 2007. 1. 7. 21:40

 

출처-[오마이뉴스 2007-01-07 14:14]



▲ 미리 내려다 놓은 차들.
ⓒ2007 이형덕
▲ 지워지는 길들.
ⓒ2007 이형덕
▲ 눈맞은 억새밭.
ⓒ2007 이형덕
눈이 온다기에 차를 집 아래에다 내려다 두고 왔지만, 어젯밤은 포근했습니다. 새벽에 추적거리며 내리던 비가 점점 굵어지면서 푸짐한 함박눈으로 돌변합니다. 바람까지 불어 오랜만에 눈보라 속에 길을 나섰습니다.

눈발이 굵어지며 마을길이 희미하게 지워집니다. 눈보라 속에서 전주와 잣나무 숲이 신비로운 윤곽으로 몸을 숨깁니다. 가지만 남았던 신닥나무며 시무나무, 낙엽송에는 난데없는 눈꽃이 목화처럼 피어납니다. 겨우내 마른 피리소리로 울던 억새들도 때아닌 꽃을 하얗게 피워댑니다.

목화처럼 피어나는 눈꽃

▲ 눈에 덮이는 목장.
ⓒ2007 이형덕
이렇게 눈이 퍼부을 때는 눈을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눈발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부지런히 트랙터로 마을길을 내던 작목반장도 오늘은 뵈지 않습니다. 목장의 소들도 우사 안으로 들어가 눈을 피하고, 고장난 경운기만 눈에 맥없이 덮여가고 있습니다. 우분으로 지저분하던 목장도 눈오는 날은 예수님 태어나신 마굿간처럼 향기롭습니다.

볼 일만 아니라면 건너 마을 길가의 토담집 따끈따끈한 아랫목 구들방에 앉아 온종일 마실이나 하다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렇게 눈발이 날리는 날이면 현인씨가 특유의 창법으로 부르던 '눈보라가 몰아치던 바람찬 흥남 부두에...' 하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 휩쓸려 혹한의 엄동에 가족과 헤어져 고향을 떠나던 사람들의 애환이 가슴에 와닿지만, 어릴 때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장난삼아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우리 목장 예수님 나신 마굿간 같네

▲ 따끈따끈한 흙집 구들방.
ⓒ2007 이형덕
▲ 차가 끊긴 마을길.
ⓒ2007 이형덕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면 마을에 두세 번 들어오는 버스도 오지 않습니다. 큰길까지 걸어서 30분을 걸어 나가야 합니다. 큰길에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석고개 비탈길에 승합차 두어 대가 미끄러진 채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전족을 한 중국 여자처럼 몸에 비해 턱없이 작은 바퀴를 신은 승합차들은 눈오는 날이면 곤욕을 치릅니다. 가만히 그 뒤에 멈추어 기다리는데 앞 차가 미끄러져 멀건이 눈을 뜨고 충돌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승합차 뒤는 따라가지 않습니다.

처음 물골에 들어오면서 구입한 자동차는 4륜 구동장치가 있어서, 눈길에 덜 미끄러집니다. 길이 워낙 구불거리고 비탈이 많아 자동차용 체인을 네 개나 구입했는데, 한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지금쯤 광 속에서 쥐들이 마실갈 때 설피처럼 채우고 다닐 것입니다.

아파트에서는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대로에는 언제 눈이 왔는가 싶게 눈이 말끔히 녹아 있습니다. 이럴 때가 가장 황당합니다. 내 차 위에만 얹힌 푸짐한 눈들이 민망할 뿐입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부터 제설작업이 이루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다니는 차도 적은 시골길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이에게 들렀더니 눈이 온 줄도 모르고 있더군요. 반팔 차림의 지인은 내복을 입고, 머리에 털모자까지 뒤집어 쓴 채 눈사람처럼 하얗게 눈에 덮인 나를 무슨 외계인 보듯 한참을 바라봅니다.

잠깐 해가 드는가 싶던 날씨는 오후가 되면서 다시 눈발이 이어집니다. 저녁이 되어서는 채찍 소리를 내며 바람까지 웅웅 울어댑니다. 모처럼 문풍지를 울려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옛 사람들이 정한 절기에 새삼 탄복합니다.

소한이 내린 벌, 참 오랜만이야

▲ 눈 속에 갇힌 수자골.
ⓒ2007 이형덕
소한(小寒)은 소한입니다. 그나저나 그대로 눈에 쌓인 채 얼어붙은 저 눈들을 어찌해야 할까. 녹다가 얼어붙은 눈은 넉가래로도 밀리지 않고, 빗자루로도 쓸리지 않습니다.

차를 마을길까지 내려다 놓고, 외투 깃을 세운 채 종종 걸음으로 며칠 오가야 하려나 봅니다. 요 몇 해 겨울이 푸근하여 그런 적이 없었는데, 소한이 자신을 우습게 보았다고 벌을 주려나 봅니다.

오랜만에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아보는 것도 겨울의 별미 아니겠습니까. 빈 논에 쌓인 눈을 파르스름한 겨울밤에 부엉이 울음 들어가며 걸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겠습니다. 눈에 발이 묶이는 불편함 대신에 소한이 건네주는 겨울 선물이 아닐까 여겨봅니다.

▲ 제 철 만난 개들.
ⓒ2007 이형덕


덧붙이는 글
나중에 '남양주뉴스'에도 실립니다


기자소개 : 이형덕 기자는 남양주 물골에 살며, 보고 겪은 일들을 모아 <시골은 즐겁다>(향연) 산문집을 펴냈으며,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http://sigool.com)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