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요리】

"호박죽이 보약보다 낫네?"

피나얀 2007. 1. 9. 22:06

 

출처-[오마이뉴스 2007-01-09 16:35]



▲ 호박죽에 쓰일 호박, 죽 맛을 결정하는 것은 호박보다 정성이다.
ⓒ2007 강기희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합니다. 해거름이라 보기는 좋지만 걱정이 앞섭니다. 오늘밤부터 눈이 오고 추워진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겨울이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산촌의 추위는 어린아이의 오줌발도 얼게 할 정돕니다. 더구나 소한 추위라고 합니다. 대한 추위보다 소한 추위가 맹렬하다는 건 경험상으로 아는 것이지요.

장날만 기다리는 어머니, 말리는 아들

어머니의 방 아궁이에도 연기가 잦아 들었습니다. 어둠이 오기 전에 군불을 땠기에 지금쯤은 감자 구워 먹기 좋을 정도로 알 불만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요즘 감기로 고생을 하십니다. 열흘 가까이 되나 봅니다. 지난 연말 강추위가 몰아닥칠 때 정선 장터에 나가셨던 게 원인입니다. 캐 두었던 냉이를 팔아야 한다며 장터에 좌판을 펼친 게 몸만 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장날 포근했지만 나가지 못했던 어머니는 낼 모래(7일) 정선 장날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워진다는 말에도 산촌 생활이 답답한 모양입니다.

"낼부터 엄청 추워진다는데, 장날은 무슨."
"냉이 좀 캐 놓은 거 있는데 이걸 팔아야지."
"어따, 나한테 팔어요. 내가 사면 되잖어."


어머니가 쌀포대에 들어있는 냉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합니다. 나는 샀다고 치고 돈 2만원을 어머니의 손에 쥐어줍니다. 일단 그렇게라도 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아직 감기가 낫지 않았거든요.

감기 걸린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호박죽'

▲ 끓인 호박죽, 맛있게 보이나요?
ⓒ2007 강기희

노인들 감기는 무섭습니다. 한번 걸리면 좀처럼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 감기는 젊은 사람도 한 달씩 가는 무서운 감기라고 합니다.

어젠 마을에 있는 보건진료소에 가서 주사도 한대 꾹- 맞고 약도 타왔습니다. 한동안 문을 닫았던 진료소에 새로운 소장님이 오셔서 활기가 돕니다. 슬쩍 진료소를 살폈더니 다른 지역에 근무할 때 받은 감사패까지 있더군요.

더구나 여성분이라 어머니와는 인연이 잘 맞을 듯합니다. 자주 집에도 들러 준다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근사근하신 게 주사도 아프지 않게 놓는다며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더군요.

호박죽 먹고 감기 떨어지면 장터 가야지

오늘은 입맛이 없어하는 어머니를 위해 호박죽을 끓였습니다. 농사지은 호박을 칼로 썩썩 깎아 푹 끓이면 됩니다. 요리하는 건 쉽지만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눌어붙으니 계속해 저어야만 합니다.

물론 호박만 넣는 것은 아닙니다. 찹쌀도 넣고 소금 간도 조금 해야 합니다. 팥이 있으면 넣어도 좋겠지요. 호박죽을 처음 끓이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가 서울에 사실 때였으니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도 겨울인데 마당의 얼음판에서 넘어지셔서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설 명절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생긴 사고였지요. 명절을 우리 집에서 보내기로 하고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 날이 푸근한 틈을 타 냉이를 캐는 어머니. 집에서 쉬라고 말려도 소용없다.
ⓒ2007 강기희

움직이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방에 모셔두고 할 수 있는 음식이란 게 호박죽밖에 없었습니다.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다른 식사는 입에 대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때 처음 호박죽을 끓였는데 맛이 형편없었습니다. 결국 다 버리고 다시 끓였습니다.

두어 번 호박죽을 끓이고 나니 그 후엔 호박죽 끓이는 선수가 되더군요. 많은 양을 끓이면 보관이 어려운 탓에 하루 두 번은 끓여야 했거든요. 일주일 정도를 그렇게 했나 봅니다.

어머니의 허리는 좋아졌고 명절 다음날 아버지가 모셔갔지요. 그 일로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함께 살기를 소원했는데 올해 그 소원을 이룬 것이지요.

다 같은 자식이라도 어머니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자식이 좋은가 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게 없다지만, 그것은 어머니 마음이지 자식들은 그런 거 생각도 않고 사는 게 요즘 세상이지요.

냉이 놓고 모자가 티격태격, '샀다' '안 판다'

▲ 호박죽을 드시더니 냉이들 다듬기 시작한다. 이럴 땐 지켜보는 게 효도다.
ⓒ2007 강기희

호박죽이 맛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냄새도 좋습니다. 내심 솜씨는 여전하구먼, 하며 한 그릇을 어머니께 드립니다.

"맛있네, 참 맛있어. 이거 먹고 감기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
"감기 떨어지면 이번 장날 나가실라고?"
"그럼 나가야지."
"에이, 그럼 호박죽 괜히 끓였네. 이건 장날 못 가게 하려고 끓인건데."


장날마다 어머니는 호박죽이나 팥죽을 사드십니다. 예전부터 죽을 좋아하셨거든요. 서울에 계실 때도 어머니 집에 가는 날은 꼭 팥죽이나 호박죽을 사 가지고 갔었거든요.

"냉이 없애 치워야지."
"아따, 그 냉이 아까 내가 샀잖어. 그건 내꺼니까 손대면 절도여. 절도."
"절도가 뭐여?"
"그런 게 있어. 아무리 모자지간이지만 아들 물건을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말이여."
"그럼 난 안 판다."


어머니가 받은 돈을 꺼내며 말합니다. 기어이 장날 나가시려나 봅니다. 이럴 땐 눈이라도 많이 와 차가 움직이지 말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번 눈길에 장터 나가다 사고 난 일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손이 예쁜 어머니, 그 손이 자식들을 다 키웠다

호박죽 두 그릇을 비운 어머니는 잠시 구들장에 누워 등을 지지시더니 거실로 나옵니다. 주섬주섬 뭔가를 챙기는데 낮에 캔 냉이입니다. 뭐하냐 물으니 냉이를 다듬어야 한답니다. 그냥 팔아도 되지만 먹을 사람 생각해서 깨끗하게 손질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생각입니다.

이쯤 되면 말릴 수도 없습니다. 말리다 보면 싸우게 되는 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냥 어머니가 하는 걸 지켜보며 잘한다고 칭찬만 해야 합니다.

"어머이 손 참 이쁘네. 근데 손톱이 너무 긴데?"
"촌에서는 손톱이 일하는 거여. 손톱이 짧으면 암 것도 못해."


그건 어머니의 말이 맞습니다. 시골에선 손톱이 짧으면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경험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매니큐어 한 번 칠하지 않은 어머니의 손이 자식들을 다 키웠습니다. 쪼글쪼글 한다 해서 전혀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의 손입니다.

개 짖는 소리가 큽니다. 산짐승이 내려왔나 봅니다. 강원도 정선의 시골 밤은 이렇게 개 짖는 소리와 함께 깊어갑니다.

▲ 어머니께서 손수 기른 호박, 보약 덩어리들이다.
ⓒ2007 강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