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기차는 바다를 보러 간다

피나얀 2007. 1. 13. 20:14

 

출처-[세계일보 2007-01-12 09:18]




“바다가 보이는 자리로 주세요.”

 

부산 부전역과 경북 포항역을 실처럼 잇는 동해남부선. 역사 매표소엔 ‘바다’를 주문하는 손님들이 많다. 겨울 바다를 가슴으로 껴안으려는 사람들이다. 열차가 해운대역을 지나치자 손에 잡힐 듯 바다가 가까이 스쳐 지나간다. 차가운 바닷물이 만져질 것만 같다. 차창은 선명한 쪽빛을 투사하는 16: 9 스크린. 교통체증 걱정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 눈바람이 몰아쳐도 열차는 레일 위를 리듬 있게 미끄러져 간다.

 

# 오리엔트 특급 바다 풍경

 

부산에 사는 김태현(29)씨는 여자친구와 경주로 나들이하는 중이다. 평소 승용차로 야외 데이트를 다니던 이들이 동해남부선을 탔다. 커플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지기를 기다린다. 김씨는 운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홀가분하다. 자유로운 두 손으로 연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김씨는 “운전하면 피곤하니까 말수가 줄게 되지만, 기차 여행은 맘껏 대화할 수 있어 여자친구가 좋아하네요”라고 귀띔한다.

 

 

이윽고 창밖으로 수평선이 보이자 둘은 잠깐 말을 멈춘다. 김씨는 “부산에서 15년 동안 살았는데, 왜 동해남부선에 이런 코스가 있다는 걸 몰랐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서쪽 좌석을 배정받은 커플은 슬며시 바다가 보이는 동쪽으로 옮긴다. 구석 자리에는 “킥킥” 소리 죽여 웃으며 제법 진하게 애정 표현을 하는 이들도 있다.

 

방학을 맞아 기차 여행을 하는 김아람(20), 김미희(20)씨도 동해남부선이 숨겨놓은 명소에 감탄한다. 지난 학기 공부에 지친 심신이 새롭게 활력을 얻는다. 이들은 차분히 진동하는 열차 안에서 다이어리를 적거나 책을 읽는다.

 

“기차 여행만으로도 가슴이 뛰는데, 속 시원한 바다 경치까지 선사받으니 대단한 이익을 본 것 같아요. 오늘치 기행문엔 쓸 것이 많겠는데요.” 둘은 뜻밖의 행운을 잡은 듯 목소리를 높인다.

 

사진집단 일우 제공

사진집단 일우 제공

 

총연장 147.8㎞의 이 노선의 역사는 깊다. 경주∼포항은 1918년 10월, 부산∼울산∼경주는 1935년 12월 각각 연결됐다. 부산, 울산 등을 오가는 상인들이 오랜 세월 자가용처럼 이용했다. 객차엔 여전히 보따리를 머리에 인 할머니들이 눈에 띈다.

 

젊은 여행객들이 요즘 동해남부선을 많이 찾는다. 해운대역∼송정역 구간, 일광역의 일망무제(一望無際) 바다 풍경이 볼거리다. 얼마 전 문화재로 등록된 송정역도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 주말이면 MT 온 대학생들과 관광객으로 열차는 만석이 된다.

 

동해남부선은 사진 출사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사진집단 일우’가 동해남부선을 주제로 해안 철도의 우수를 담은 전시회를 열었다. 1년 동안 발품을 팔고 나서야 동해남부선의 매력을 그런대로 그러모을 수 있었다.

 

‘그림 좋은’ 장소는 영화 배경으로도 즐겨 쓰이는 법. 영화 ‘거룩한 계보’는 바다와 철길, 도시 건물이 어우러진 미포 건널목(해운대∼송정 구간) 풍경을 빌렸고, ‘파랑주의보’도 부근 기찻길을 배경으로 삼았다.

 

 

한반도에서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볼 수 있는 구간은 단 세 군데다. 동해남부선 외에 정동진∼묵호 구간과 전라선 여수∼만성리 구간이 바다 곁을 달린다. 장엄한 일출로 이름난 정동진 열차는 옥계역 부근에서 바다 경치가 절정을 이룬다. 한려해상공원 일부인 여수역 또한 남해 바다의 반짝이는 물빛을 자랑한다. 서정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와 ‘기차’가 어우러지는 곳인 만큼 감성을 건드리지 않는 곳이 없다.

 

허영자 시인은 ‘변산바다’라는 시에서 “변산바닷물은 하오 다섯시에도 오히려 따스하였습니다”라고 노래했다. 바다가 보이는 동해남부선 객차는 겨울 찬바람이 불어도, 변산바다와 채석강이 보이지 않아도, 오후 5시가 아니어도 더없이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