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보헤미안을 위한 거리, 인사동

피나얀 2007. 1. 13. 20:12

 

출처-[오마이뉴스 2007-01-12 10:00]



▲ 인사동에선 천천히 걸어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2007 강기희

거리는 차다. 몰아치는 바람은 여행객의 옷자락을 휘감는다. 플라타나스 낙엽을 밟으며 걷다보니 어느덧 인사동이다. 여행객이 되어 돌아온 인사동은 몇 해 전에 비해 달라져 있었다. 낯선 상점이 그렇고 낯선 오락실이 그렇다.

젊은 날 넘치는 '끼'를 주체 하지 못해 방황하던 인사동 거리

차량이 다니는 큰 길을 버리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눈에 익숙한 간판들이 반갑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도 예전 그대로다. 파전이 그러하고 쉬직한 막걸리가 그러하다.

인사동의 매력은 골목이다. 골목이 없는 인사동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은 숱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깊은 밤 술에 취해 쓰러진 곳도 인사동의 골목이고 어찌어찌 찾아든 곳도 인사동의 여관방이다.

다음 날 해장국을 사러 나온 이도 인사동으로 왔고 해장국에 따라나온 해장술을 마시고 또 취해 쓰러진 곳도 인사동의 한 골목이다. 인사동은 그렇게 내 키를 키웠고 마음을 키웠다.

허접한 내 정신을 키운 것도 헌책방의 낡은 책과 인사동 골목이다. 오래된 책 한 권 만나 아무데다 퍼질러 앉아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은 인사동의 또 다른 추억이다.

젊은 날 인사동을 처음 만났을 때는 피가 끓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이들과 스스럼없이 막걸리 잔을 나눈 곳도 인사동이다. 서로의 이름 따윈 애당초 중요하지 않았다. 인사동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술잔이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 인사동 골목, 술 익는 냄새가 그윽하다.
ⓒ2007 강기희

인사동은 보헤미안을 위한 거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인사동에 오면 마음이 풍성했다. 거리를 떠도는 것들은 들이마시기만 해도 양식이 되었다. 정신적인 영양실조는 인사동에서만 극복이 가능했다.

비릿한 소금기를 생각하고 그 섬에 갔다면
실망한 하고 돌아설 섬 그 섬엔 갯벌이 없다

인사동의 골목을 돌고 또 돌아 그 섬에 가면
풍란은 없고 막자란 구름 국화 몇 송이가
휘청하며 객을 맞는다

시대의 보헤미안들이 모이는 그 섬엔
고독과 절망이 외롭지 않게 허공을 떠돌고
깊은 밤이 되면 모두가 국화 향에 취한다

내 절망은 너의 가슴으로 안기고
가슴을 열어보이는 너의 순한 얼굴은 회색빛으로 운다

밤은 깊어 흔들리는 몸을 끌고 그 섬을 나서면
또 다른 절망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 섬엔 갯벌이 없다
섬도 없다
아무도 없다
- 강기희 시 '그 섬엔 갯벌이 없다' 전문


인사동 골목에서 문학을 줍고 그림을 줍고 사진을 줍는 동안 내 정신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다. ‘서울탁주’ 한 사발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정은 가슴시린 이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다.

오랜 만에 찾은 인사동의 골목은 여전히 연애가 흐르고 이별이 흘렀다. 골목 한 견에서 눈물 짖는 한 여인의 야윈 목에는 푸른 목도리가 둘러져있고, 바람은 여인의 눈물을 잦게 만든다.

어느 집을 불쑥 찾아가도 아는 안면들을 만날 수 있는 인사동의 골목은 언제나 잔치마당이다. 훌쩍 떠났다 돌아온다 해도 인사동은 그런 이를 타박않고 반가이 맞아준다.

인사동 사람들, 조문호의 카메라에 갇히다

▲ 인사동에 가면 이런 류의 인물이 많다. 사진작가 조문호다
ⓒ2007 강기희

지난해 연말 인사동에서 조문호를 만났다. 2007년을 꼭 사흘 앞 둔 날이었다. 몹시 추웠고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었다. 해장국 생각이 간절한 그 날 나는 인사동 골목에 있었다.

사진작가 조문호는 나를 데리고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 인적이 드문 곳에 나를 세웠다. 연인이라면 입맞춤을 하기에 적당했고, 취한척 오줌발을 세워도 미안하지 않을 장소였다.

그는 지난해 초부터 인사동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지금까지 작업한 이가 100여명 된다고 한다. 모델로서는 내가 거의 마지막인 셈이었다. 지금까지 조문호의 사진 속에 가두어진 인물은 이름만 대면 다들 알만한 이들이다.

신경림 시인을 비롯해 김용태 민예총 이사장, 황명걸 시인, 민영 시인, 구중서 문학평론가, 설치미술가인 김언경, 행위예술가 이혁발, 사동면옥 아주머니, 웰빙카페 '시인'을 운영하는 김여옥 시인, 김명성 문화기획가, 그리고 소설가인 나 강기희까지.

인사동에서 자주 만나는 이들 모두가 망라된 작업이다. 인사동에서 마주치는 이들 대부분이 포함된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맞다. 분야도 다양하다. 문학을 비롯해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연극 등 모든 예술 장르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들 오래된 인연들이다. 조문호에게 있는 파일만 열어도 인사동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동안 작업한 사진은 곧 책으로 만들어진다. 사진은 2월 14일부터 인사동 공화랑에서 전시도 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으로 진행된다

▲ 그는 나를 찍고 나는 그를 찍는다.
ⓒ2007 강기희

그날 조문호는 나를 찍고 나는 그를 찍었다. 나를 찍는 조문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일은 모델인 자의 예의에서 벗어난다. 그럼에도 나는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나를 찍는 조문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담배 하나를 붙여 물고 저 쪽을 볼래예?"

사진작가는 모델을 맘대로 움직이는 힘이 있다. 날이 춥다. 작가의 말을 듣는 게 서로에게 좋은 날이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카페 <뽈> 여직원구함'이란 광고를 본다. 선급도 준다고 적혀있다. 얼마나 줄까, 생각하는 사이에도 작가의 카메라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1년 동안 고생한 카메라, 스스로 몸을 던지고

너무 추운 날씨 탓이었을까. 삼각대에 올려져있던 카메라가 바닥으로 낙하를 감행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델인 나도 조문호도 놀란 눈으로 마주볼 뿐이다.

"사진 그만 찍으라는 가비네예."

바닥을 뒹군 카메라는 고장났다. 조문호가 이러저리 돌려보더니 멎쩍게 웃는다. 그 표정이 맑다. 조문호표 웃음은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그의 웃음은 그를 좋아하게 하는 이유에 포함된다.

영하의 날씨 인사동의 골목은 정물처럼 고요하다. 골목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무슨 일을 하나 싶어 철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여자의 얼굴은 겨우 오른쪽 눈 하나만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오른쪽 눈을 급히 거두어들인다.

여자의 오른쪽 눈이 벽으로 갇히는 사이 조문호의 카메라가 가방에 들어가고 모델의 시린 손도 주머니로 들어간다.

"사진이고 뭐고 추운데 술이나 먹으러 갑시더!"

진작 그러셔야지. 그래야 인사동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 골목에서 나와 아무데나 들어갔다. 그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다. 잔을 청하니 술이 따러진다. 네 사람이 시작한 술 자리는 곧 십여 명으로 늘어난다. 그렇게 인사동의 밤이 깊어간다. 조문호가 노래를 뽑는다.

"연분홍 치이마가 봄 바람에 흩날리더라 ~"

인사동의 사랑 노래는 곧 다가 올 봄을 부른다. 겨드랑이 밑에 숨겨져 있던 봄이 조문호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술잔을 받아마시고 길을 떠난다.

▲ 인사동 골목 풍경, 골목에 있는 사동면옥에서 해장술을 먹다.
ⓒ2007 강기희


▲ 인사동의 밤이 깊어간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찾는 곳이다.
ⓒ2007 강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