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오마이뉴스 2007-01-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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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사 앞 운하-물은 탁했지만 안개와 어울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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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송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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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곳이 소주와 항주라는데,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으로서 소주와 항주를 돌아볼 기회가 생겼으니 복터졌다.
첫날은 기상악화로 출발이 지연되어 지치긴 했으나 다음날은 일정대로 시작을 했다. 소주는 동양의 베니스라 할 만큼 물의 도시라더니 운하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선지 유난히 안개가 많이 끼었다. 이날도 아침에 안개가 뿌옇게 끼어서 목은 답답하고 음산한 날씨로 추위가 몸 속까지 스며들었으나 운치만큼은 그만이었다.
한산사로 가는 길엔 유난히 검은 지붕에 흰색벽으로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그것은 예로부터 이 고장에서 유명한 지식인들이 많이 나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소주는 교육의 고장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한국 같으면 땅값이 많이 올랐겠지만 중국은 땅이 넓어선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이라지만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서 덜 번잡스럽다. 오히려 우리의 60~70년대를 보는 듯 낙후된 곳도 있다. 번화가라 하더라도 여유와 운치가 있어 눈마저 시원해졌다.
한산사를 제일 먼저 찾았다. 절 앞이 운하이고 운하 위에 아치 형태의 아담한 다리가 있었다. 이름은 풍교란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옛 운하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황제의 곡식을 실은 배가 지날 때는 다른 배가 지나지 못하게 운하를 봉쇄해서 봉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절 벽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황제가 왔다 갔음을 뜻하는 것이란다. 같은 불교권이지만 절 건물이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한산사는 1500년의 유서 깊은 절이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소주를 여행하거나 소주의 풍광을 거론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한산사에 들어서니 붉은 색 끈같은 것들이 어지러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우리의 서낭당을 보는 것 같았지만 붉은 색이 주는 느낌이 이국적이었다. 절의 분위기는 우리 절에서 느끼는 고즈넉하고 경건함을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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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사 경내와 지붕 용마루에 있는 불상 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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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송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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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웬 기암괴석들은 늘어 놓았는지, 괴이한 바위돌 하나 진열해놓고 관음봉이라 써놓았다. 아마도 소주가 넓디 넓은 벌판인지라 산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서 조그만 돌덩이 하나를 놓고 그것을 마치 산봉우리처럼 여겨 관음봉이라 해놓은 건 아닌지!
이 한산사라는 절이 유명한 것은 보물이나 빼어난 무엇이 있어서라기 보다,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 때문이다.
장계는 당나라 현종 때 사람이다. 그는 당시의 수도인 머나먼 장안(長安)에 가서 과거에 응시했다가 두 번이나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고향인 호북성(湖北省)으로 돌아가던 중 여기 풍교(楓橋)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한산사에서 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썼다는 시가 바로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현재 절에 걸려있는 종은 지금부터 한 100년 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楓橋夜泊(풍교야박)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달은 지고 까마귀 울어 찬 서리 하늘 가득한데 강가 단풍 고깃배, 불빛에 시름에 잠 못 이루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는 한밤의 종소리 나그네 배에까지 들리네.
장계의 시를 음미할 새도 없이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을 했다. 이것이 패키지 여행의 비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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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의 피사의 탑이라 불리는 호구탑과 오왕 합려의 검 3천자루가 묻혀 있다는 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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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송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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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탑으로 이동했다. 호구는 북서쪽으로 5km 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38m 정도 되는 언덕인 호구 정상에는 소주의 상징인 운암사탑, 일명 호구탑이 있다. 원래 춘추시대 오나라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장례를 지낸 3일째 되던 날 한 마리의 백호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소주는 예로부터 명검의 고장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호구의 입구에서 좀 더 올라가면 시검석이 나온다. 이것은 합려가 명검을 시험하고자 내리쳤는데 단번에 갈라졌다는 바위이며, 천 명이 앉아서 고승의 설법을 들었다는 천인석이 있다.
천인석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작다. 물론 전설이고 말 만드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겠지만 중국인들의 과장은 알아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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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구 입구의 운하- 배를 타고 한 번 돌아보고 싶기도 하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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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송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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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올라가면 합려가 아끼던 명검 3천자루를 묻었는데 이것을 탐낸 진시황제가 파다가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은 도망쳤고 그 후에 물이 고여 연못이 되었다는 검지가 있다.
검지 뒤편에는 해용산이라 불리던 호구가 있다. 호구 정상에는 운암사탑이라고도 하는 일명 호구탑이 있는데 높이가 47.5m에 달하는 벽돌탑이다. 송나라 961년에 완성된 탑이라 한다. 그런데 탑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 그때문에 동양의 피사의 탑이라 불리기도 한다.
탑은 북서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검을 찾으려 합려의 무덤을 파헤쳤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탑 아래 합려의 묘가 있어서 그렇다고도 한다.
호구는 최고 높은 곳이 40여m도 채 되지 않는 곳이지만 풍광이 아름다웠다. 오죽하면 송대에 불후의 명시를 많이 남긴 소동파가 '도소주이불유호구내시감사(倒蘇州而不遊虎邱乃是憾事), 소주에 와서 아름다운 호구를 못 보고 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했는지 짐작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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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구탑 안의 운하-물에 비친 나무의 모습이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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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송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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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왕 합려와 오나라에 대한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묻혀 있는 호구를 뒤로 하고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배낭여행이었다면 한나절을 있어도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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