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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나쁜 게 왜 좋아?

피나얀 2007. 2. 1. 19:33

 

출처-[조선일보 2007-02-01 10:27]




간만에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꽤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유독 ‘나쁜’이란 말이 들어간 책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어 코너에 갔더니 ‘나쁜 강의’라는 말이 붙은 토익·토플 책들이 눈에 띄게 보였고, 자기계발 코너에는 ‘나쁜 여자 보고서’부터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까지 나쁜 것의 대표선수로 ‘여자’가 버젓이 올라가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나쁜 심리학, 나쁜 과학, 나쁜 여행에 나쁜 크리스천까지 나쁨의 종류도 다양하다. 여기에 ‘나쁜 남자 12종’이란 제목의 책까지 있으니, 이 모든 책들을 더하면 꼭 설날용 ‘나쁜 선물세트’ 같은 느낌마저 준다.

농담처럼 자신을 나쁜 남자라고 부르고 다니는 시인 강정이나 (그는 ‘나쁜 취향’이란 대단히 재밌는 책을 썼다.) 불량스러움의 극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같은 감독이 (그는 ‘나쁜 교육’이란 정말 훌륭한 영화를 찍었다.)

 

이런 상황을 본다면 ‘나쁜’이란 말이 도매금으로 쏟아지는 요즘의 상황이 몹시 불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왜 아니겠는가. ‘나쁜 아이로 키워라’ 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책까지 나오는 마당에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가 압사 직전까지 가 있으니 말이다.

솔직히 출판계의 이런 트렌드가 내 눈엔 좀 군색해 보인다. 현대생활백서 시리즈가 유행하면 결국 지구생활백서까지 나와야 그 끝을 보는 이 못 말릴 제목 마케팅의 집중포격도 그렇지만 ‘나쁜’이란 말이 이렇게 많은 책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무리 ‘나쁜’ 이란 형용사가 멋지고 쿨한 것의 반어법처럼 쓰이는 요즘이라고 해도 말이다.

중요한 건 ‘나쁜’ 같은 말이 득세하는 동안 ‘착한’이나 ‘좋은’ 이란 말은 매력 없고, 무능한데다, 하품 나게 지겨운 것의 대명사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이젠 누군가 “너 참 착하구나!” 라고 말하면 일 못하고, 못 생긴, 이란 말쯤으로 번역돼 들릴 지경이니 이건 뭔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거다.

 

드라마나 영화, 잡지 할 것 없이 나쁜 여자들의 섹슈얼리티를 따라 잡기 위해 안달이다. 나쁜 여자들의 연애 매뉴얼을 A~Z으로 만들어 파는 하이틴 잡지부터 샤넬처럼 디자이너라는 명성 뒤에 가려졌던 세컨드(정부)로서의 삶을 얘기하면서 나쁜 여자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성인용 잡지까지 방식도 다양하다.

도대체 착하고 예의바른 여자들의 미덕은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인가. 이것이 ‘친절한 금자씨’가 더 이상 친절하지 않다는 걸 알아챈 시대의 역설일까.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름도 생뚱맞은 된장녀들이 탄생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온스타일 같은 채널에서 방송되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대개 다 나쁜 여자들이니 말이다.

 

덕분에 술, 담배, 문란한 섹스와 문신, 동거까지 나쁜 여자가 갖춰야 할 조건들이 패셔너블한 것처럼 역전되어 버렸다. 대표적인 인물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아닌가. 일은 똑 부러지게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남자 보는 눈은 지독히도 없어서 늘 좋은 남자에게만 굿바이를 외치는 헛똑똑이. 게다가 이혼남의 주변을 위성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마티니 중독자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이여. 나쁜 여자여야 성공하고, 나쁜 여자가 일도 잘한다는 식의 신화는 정말 아니올시다다. 나쁘다는 말은 이기적이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데 어떤 조직이든 이기적인 사람과는 끝이 좋을 수 없다. 또 일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있지만 (못하면 심지어 자를 수도 있지만!) 성격은 쉽게 컨트롤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특히 후배들)에겐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같은 책 보단 친절함이나 배려의 미덕에 대한 책들이 더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학습해야 할 ‘나쁜 것’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그건 분명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 아닐까. 안타까운 건 ‘나쁜 여자’ 라는 타이틀이 자신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나쁜 여자들의 그 대책 없는 나르시시즘이다. (‘나쁜 남자’들의 경우도 똑같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나문희 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그저 ‘싹퉁바가지’들의 착각일 뿐이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아폴로나 쫀쫀이의 불량스런 맛은 쉽게 잊혀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한 번만 빨아도 혓바닥 전체가 새까매지던 죠스바의 무시무시한 매력은 어떤가. 하지만 불량식품은 나쁜 음식일 뿐이다. 매일 먹을 수도, 매일 먹어서도 안 되는 나쁜 것 말이다.

 

어른인 우리는 그것이 결국 치아를 썩게 하고, 몸을 상하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쁜 게 좋다고 자꾸 우기지 말자. 드라마 ‘누나’에서 비정하고 음흉한 사채업자마저 이런 대사를 하지 않던가. 악전(나쁜 돈)은 그 끝이 나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