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오마이뉴스 2007-02-03 13:00]
요 칠 운동을 통 못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더니 찌뿌드드하다. 날이 워낙 추운데다 매서운 겨울바람 때문에 자전거 타는 것을 걸렀다. 방학 중이라 게을러진 것도 한 몫 더했으리라.
지난 1월 24일 오전 10시쯤으로 기억된다. '자전거나 타볼까?' 학교에 볼일도 있고 해서 운동 삼아 자전거 페달을 밟아보기로 했다.
들길에 들어서자 뺨에 부딪치는 바람이 생각보다 차다. 공연히 자전거를 끌고 나왔나 후회가 된다. 기왕지사 힘차게 달려볼 수밖에. 40여분 달리다 보면 몸도 마음도 가푼해지지 않을까 싶다.
겨울 벌판이 황량하다. 기러기 떼가 큰 무리를 지어 머리 위를 지난다. 요즘 들판의 주인은 쇠기러기 떼다. 녀석들은 아침에 주로 이동을 하는 모양이다. 멋진 V자 대열을 짓기도 하고, 앞선 대장을 따라 일렬로 날기도 한다. 그러다 고픈 배를 채우려고 논바닥에 죽치고 늘어앉아 떠드는 모습은 장관이다.
수로에는 오리 떼가 노닐고 있다. 청둥오리이다. 물고기라도 보았는지 미끄러지듯 자맥질하는 모습이 여유롭다. 자전거 지나는 소리에 놀라 푸드득 놀라 내뺀다.
전봇대에서 멋진 폼을 잡는 까치, 까악까악 소리를 내는 까마귀, 그리고 작은 참새 떼까지 반가운 손님들이 많다.
'아니! 저거 고라니 아냐?'
앞만 보고 힘껏 페달을 밟는데 논 가운데 웬 짐승 한 마리가 보인다. 처음 멀리서 볼 때는 염소를 묶어놓은 게 아닌가 하고 착각했다. 가까이서 다가서니 몸 색깔이 염소가 아니다. 순간 자전거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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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라니가 재롱이라도 부리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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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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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빼다 뒤를 돌아보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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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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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줄행랑을 치는 고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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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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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꺼내 줌을 당겼다. '고라니 아냐?'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게 분명 고라니다.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이 뛰기 시작한다. 조금 가다가 멈춰 경계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선 이내 팔짝팔짝 뛰어간다. 녀석의 모습이 참 귀엽다.
카메라 셔터가 서너 번 눌러지기도 전에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다. 녀석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 사진에 담지 못한 게 아쉽다.
고라니가 왜 들판까지 내려왔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마침 걷기 운동을 하는 아저씨 한 분이 마주오고 있다.
"아까 고라니 지나는 거 보셨지요?" "고놈 참 크대요." "들판에 먹이를 찾아 왔나 보죠?" "수로에 있는 마른 풀이라도 먹으러 오는 거겠지."
고라니를 본 논 옆 수로에는 줄과 갈대 등으로 풀숲을 이루고 있다. 아저씨는 들에서 일하다 가끔 고라니를 본다고 한다.
자전거를 다시 타기 시작했다. 모처럼만에 본 야생동물을 보니 기분이 좋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을 함께 목격한 사람이 있어 기쁨이 더한 것 같다.
논길을 벗어나 찻길로 접어들었다. 언덕길이라 힘에 부친다. 지금부터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그런데 웬 일인가? 찻길 옆 논에 고라니 한 마리가 또 서있는 게 아닌가! 좀 전에 본 녀석이 금세 여기까지 올 리가 없는 데…. 자전거에서 또 내렸다. 아까 그 녀석과 한 쌍일까? 같이 나들이 나왔다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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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에 나나탄 고라니. 올 겨울 건강하게 자라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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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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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카메라를 꺼냈다. 눈치 빠른 녀석, 어느새 내뺀다. 다행이 가까이 녀석의 모습이 잡혔다. 부지런히 도로를 건너 산길로 사라진다. 셔터에 녀석의 생생한 모습이 또 잡혔다.
무사히 산으로 올라가게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자칫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이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는가 싶다.
심심찮게 목격하는 고라니
요즘 고라니 수가 많아진 게 분명하다. 눈 덮인 겨울 산에 오르면 고라니 발자국으로 생각되는 흔적이 눈에 띈다. 고라니 때문에 농가에서도 피해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 집은 산기슭에 자리 잡아 집 근처까지 내려오는 고라니를 본 적이 있다. 이웃집에서는 산비탈 밭을 가꿔 고구마를 심는다. 고구마를 옮겨 심고 밭 가장자리에 그물망을 친다. 고라니가 내려와 순을 잘라먹어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작년 봄, 이웃집 아저씨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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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비탈 밭에는 고라니 피해 때문에 그물망을 치기도 한다. 이 밭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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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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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가 많아진 게 분명해! 이렇게 고구마 순까지 먹으로 오는 것을 보면 말이야. 무성하게 줄기를 뻗을 땐 그래도 괜찮지. 그런데 어린 순을 뜯어먹으면 농사 망치는 수가 있거든!"
고라니가 미운 짓을 하기는 해도 밭에서 보면 아저씨는 반갑다고 하였다. 겁이 많은 녀석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이내 도망을 친다는 것이다. 줄행랑을 치며 내뺄 때는 어찌나 빠른지 모른다고 한다.
요즘 야생동물이 많이 사라졌다. 일부는 멸종하고 개체수도 현격이 줄었다. 그런데 고라니는 우리나라에 사는 야생동물로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개체수가 늘어 사람 눈에도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것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과 함께 살 수 있어야
고라니는 갈대밭이나 관목이 우거진 곳에 서식하며, 건조한 곳을 좋아한다. 갈대나 거친 풀을 즐겨먹는다. 줄과 억새가 무성한 풀숲이 있는 물가 근처 논에서 발견된 것이 우연은 아닌 듯싶다.
고라니 숫자가 늘어나고부터 이른바 로드 킬(road kill)로 죽음을 당하는 고라니를 가끔 보게 된다. 어둠이 깔린 도로에서 질주하는 차량들로부터 고라니뿐만 아니라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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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라니는 찻길을 가로 질러 산으로 도망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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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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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먹을 게 부족한 겨울, 먹을 것을 찾아서 찻길을 건너다 불빛을 보고 피하기 전에 달려들다 변을 당한다. 내가 본 고라니는 천방지축으로 내달리면서 무사히 산으로 올라간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야생동물한테 총을 쏘고, 올무를 걸어 잔인하게 죽이고 있다. 인간의 잔인한 이기심 때문이다. 야생동물과 인간이 공존을 모색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는 없을까? 이러다 고라니까지도 자취를 감추게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고라니와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 하고, 학교에 도착하였다. 나는 내 카메라에 잡힌 사진을 선생님들께 보여주었다. 저마다 신기한 듯 한마디씩 한다.
"난 고라니를 처음 봐요. 아주 당당해 보이는데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으로 보아 건강해 보여요." "수놈은 송곳니가 밖으로 나온다는 데…. 암놈인가?" "새끼를 많이 낳아 식구들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추운 날씨지만 자전거 타며 운동을 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고라니를 사진에 담고 보니 예쁜 친구가 하나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먹이를 찾아 들판에 내려온 고라니가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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