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니가타① 순백의 대지에 발자국을 남기다

피나얀 2007. 2. 7. 20:02

 

출처-[연합르페르 2007-02-07 09:34]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 혹은 과시욕이 넘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사실이 있다. 장군의 옷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처럼 '그 동안 가본 나라가 몇 개인가'라는 점이다.

 

앉은자리에서 땅을 밟아본 나라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으면 여행 고수일 것이라 추측하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한 국가에서 진득하게 여행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처럼 소위 말하는 '핵심 일주'를 선호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행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라 횟수나 기간은 큰 의미가 없다. 어떤 외국인이 서울에서 단지 2박 3일을 체류한 후에 '한국을 여행했다'고 떠들어댄다면 왠지 염치없고 밉상스럽게 보일 것이다. 한반도에는 서울 외에도 전국 곳곳에 숨겨진 볼거리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껏해야 3~4일에 불과한 도쿄나 오사카 여행만으로 '일본을 여행했다'고 얘기하기는 적절치 않다.

 

일본은 의외로 넓은 나라다. 역사적으로 쌓아왔던 좋지 않은 감정 탓인지 자꾸 일본을 '작게'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 면적보다 넓고 기다란 나라다.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홋카이도의 삿포로까지 가려면 기차를 2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시간도 18시간 가까이 걸린다.

 

3시간 안팎의 서울과 부산 사이에 대전과 대구를 비롯해 많은 도시들이 있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도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볼만한 곳들이 많다. 특히 동해에 접해 있는 일본의 여행지들은 교통이 불편해서 대부분 외면하고 지나치는데, 그만큼 순수하고 일본적인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진정한 설국, 유자와


좀체 눈(雪)을 볼 날이 없는 도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니가타의 유자와에는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서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귀를 싸매고 고무장화를 신고 역으로 마중 나온 안내원의 모습에 놀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퍼붓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였다. 몇 시간 만에 차에 눈이 쌓이고 길도 눈으로 뒤덮여서 차로를 분간할 수 없었다. 회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은 사물의 실루엣만 남기고 만물을 삼켜버릴 듯했다.

 

몇 시간 뒤엔 갑자기 탐스러운 눈송이가 온화하게 흩뿌렸다. 막연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하고 청량해졌다. 눈꽃이 빚어낸 설경도 고혹적이지만, 작은 마을에 눈이 오는 경치도 소담스러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유자와의 료칸에서 경험했던 사연을 토대로 작품을 집필했다. 유자와에는 지금도 온천을 갖춘 료칸이 즐비하다. 이 지역의 온천은 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동네 주민들의 약탕으로 이용됐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온천의 자질구레한 효능이나 명성보다는 바깥을 바라보며 몸을 따뜻하게 담글 수 있는 노천탕이 더욱 끌리기 마련이다.

 

유자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료칸 '후타바'에는 옥상에 노천탕이 있다. 흔히 말하는 형언할 수 없는 절경도 아니고, 흔하디흔한 일본일지도 모르겠지만 노천탕에서 바라보는 순백의 유자와는 예뻤다. 눈이 오는 세상은 언제 봐도 순결하고 맑다.

 

◆몸을 녹이고, 마음을 풀다


니가타는 정적이고 안온한 여행지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발도장을 찍기보다는 '쉬러' 가기 적당한 장소다. 일상의 피곤에 지쳐 있는 사람에게 부단히 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은 고행일 뿐이다. 삶이 고단할 때면 머릿속의 상념을 잊고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 채 칩거하고 싶은 법이다. 이러한 사람을 위해 추천하고 싶은 곳이 니가타 현이다.

 

유자와에서 멀지 않은 무이카마치에는 전통 료칸인 '류곤'이 자리하고 있다. 료칸은 하룻밤 사이에 일본의 문화와 정서를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숙소다. 1박 2식으로 구성되는 료칸에서 여유 있는 휴식을 취하려면 일찌감치 도착하는 편이 좋다.

 

료칸에서는 저녁식사 시간을 예약하고 난 뒤에 마땅히 할 일이 없지만 주위에 배치된 정원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즐기거나 노천탕에 몸을 담글 수 있다. 이렇게 쫓기지 않고 온전히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노천탕을 의미하는 일본어 '로텐부로(露天風呂)'는 곱씹을수록 낭만적인 단어다. 이슬과 하늘, 바람과 음률을 뜻하는 로텐부로는 노천온천에서 느끼는 행복을 모두 나타낸 듯하다.

 

실제로 류곤의 온천에 몸을 담그니 코끝으로는 냉기가 엄습했지만 몸은 이내 따뜻해졌다. 앞으로는 새하얀 설경에 덧대 눈발이 날렸고, 가끔 불어오는 찬바람은 얼굴을 씻고 지나갔다.

대지는 얼음장 같았지만 물은 따스했고, 머리는 차가웠으나 가슴은 뜨거웠다. 자연의 청정한 공기로 호흡하면서 온천에 몸을 맡겼다.

 

니가타에는 이름난 온천이 많은 만큼 유명한 료칸도 많다.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료칸에서 체류하는 동안에는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고 느슨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료칸의 참맛과 여행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