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미녀의 고향에서 강남 문자향에 취하다

피나얀 2007. 3. 26. 19:08

 

출처-[오마이뉴스 2007-03-26 18:21]

 

 

▲ 항저우 시링치아오 옆에 있는 가기 소소소의 묘

 

ⓒ2007 조창완

 

이윽고 마지막 날이다. 항저우 호텔에 나와 베이산루(北山路)를 거쳐 구산(孤山)으로 향했다. 이제 막 풀리는 날 때문에 유람선을 타기 위해 분주히 다니는 이들의 모습이 밝다. 구산으로 넘어가는 시링치아오(西泠橋) 앞에는 정자로 된 작은 소소소(蘇小小)의 묘가 있다.

그녀는 남제시대 이곳의 유명한 가기(歌妓)였다. 그런데 어느날 바이티(白堤)에서 완욱(阮郁)이라는 청년을 만나 둘은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완욱은 아버지를 따라 수도로 간다. 이후 소소는 완욱을 잊지 못해 수청을 거절하다가 죽는다. 나중에 활주(滑州 지금의 전지앙 鎭江)자사 포인(鮑仁)이 돈을 대어 그녀를 장례해 주었다고 한다.

우리 춘향전과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에 대한 회고시(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듯)를 지은 이야기가 겹친 것 같아서 흥미롭다.

▲ 시링인스에서 바라본 시후 모습
ⓒ2007 조창완
길을 건너 중국 근대 여성혁명가인 추진(秋瑾)의 묘를 지나면 곧 시링인사가 나온다. 시링인사(西泠印社)는 임처학자 임포가 산 고산(孤山)의 남쪽에 있는 작은 집이다. 말 그대로 인쇄소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문자향에 취하면 우리 선조들도 보인다. 김풍기 교수가 이곳과 우리나라의 인연을 설명한다.

이곳을 만든 이는 중국 근대 전각의 대부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이다. 중국에서 석각이나 전각은 글씨를 넘어서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 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도 중국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전각체에서 따온 추사체를 구사했는데, 이런 뿌리가 이곳과 닿아 있다고 한다. 특히 중국 지인의 부탁으로 추사가 진흥왕순수비 등을 찾았다니 중국 전각의 중요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셈이다.

▲ 시링인스 창후 너머로 시후가 펼쳐진다
ⓒ2007 조창완
시링인사를 나와 다시 그 자리에서 차를 타고 청황먀오(城隍廟) 아래에 있는 칭허팡(淸河坊)으로 향했다. 칭허팡은 남송(南宋)시대부터 만들어진 곳으로 항저우 시내에서 유일하게 보존되는 전통 거리다. 쑹청(宋城)도 옛날거리지만 그곳은 세트장이라면 이곳은 옛 모습 그대로 이기 때문이다.

칭허팡의 가장 큰 자랑은 이미 수백년의 역사까지 가진 전통 상점들이다. 강남 최고의 우산 가게인 루왕싱지(如王星記), 칼 가게인 장샤오추안(張小泉), 강남 최고의 약국인 후칭위탕(胡慶余堂)과 팡후이춘탕(方回春堂), 항저우 유명 음식점인 장위앤관(將元館), 유명한 술 제주가인 왕룬싱(王潤興) 등 수많은 전통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 시간의 자유시간에 사람들은 시장을 자유롭게 돌아본다. 패키지 여행을 왔을 때 들러서 100위안 이상 주어야할 차들도 15위안 정도면 살 수 있고, 약재나 비단은 물론이고 각종 액세서리도 편하게 구매할 수 있다.

지성의 산실 샤오싱, 닝보

▲ 샤오싱 음식문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시엔헝지우디엔
ⓒ2007 조창완
자유시간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샤오싱으로 향했다. 2001년엔가 첫 걸음을 한 후 벌써 다섯 번째의 걸음인데도 샤오싱은 왠지 기대가 된다. 사실 다섯 번을 다녀갔지만 아직도 왕희지의 '난정서'가 써진 '난정'을 다녀오지 못했고, 우펑추안(烏蓬船)을 타지 못했으니 샤오싱을 다녀가지 않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다음번에도 다녀갈 수밖에 없다.

우리 학자 가운데 중국 답사에 관해서는 손꼽히는 박한제 교수도 샤오싱에 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는 루쉰이 20년 만에 다녀간 샤오싱의 겨울을 이야기하며, 지상의 천당이라 일켣는 항저우와 쑤저우와 다른 위대한 무엇이 있다고 본다. 그런 느낌은 기자에게도 마찬가지다. 한 여름날 황주에 취해 밤길을 헤맨 적도 있고,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 이곳의 바에서 맥주를 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길은 그저 샤오싱에서 점심만 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을 잡았다. 시간의 조절도 있지만 그래도 샤오싱은 들르고 싶은 곳이다. 점심 장소이자 루쉰이 애용하던 시엔헝지우디엔(咸亨酒店)에 들렀다. 시엔헝지우디엔은 이제 작은 가게를 넘어서 기업이 되어버렸다. 중국 최고의 명 음식으로 꼽히는 샤오싱 음식을 전 중국에 판매하는 대형 제조업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명한 것이 바로 샤오싱주다.

그래도 옛날의 술집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뤼쉰 옛집의 바로 옆에 있는 이곳은 '풍파(風波)'와 '공을기(孔乙己)' 등 상당수의 작품에도 등장하는데, 루쉰은 이곳에서 소흥주에 회향콩을 즐겼다. '공을기'가 12살 때부터 사환노릇을 했다는 글이 있어선지 젊은 일하는 이들이 왠지 정겹다.

사실 샤오싱을 갈 때마다 놀라는 것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들이 참 이쁘다는 것이다. 과거 월왕 구천의 본거지로 인근에 중국 3대 미인 서시(西施)의 고향이 있지만 샤오싱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미모는 항저우는 물론이고 중국 전역에서도 손꼽힌다.

식당에 들어서자 점심시간이라 많은 이들이 편안한 자세로 식사를 한다. 반면에 신관은 새롭게 정비해 고급 음식점으로 꾸려져 있다. 강남의 게요리를 곁들인 10인용 코스요리가 500위안대니 비교적 저렴하다.

거기에 이곳의 특산인 샤오싱지우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저녁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공식적인 마지막 식사다. 사실 어느 여행이나 마지막 식사면 '최후의 만찬'처럼 비장한 느낌이 든다. 인솔자임에도 그럴 때는 술을 좀 마시는데, 이날도 샤오싱지우 반 병 가까이를 내가 비운 느낌이다.

샤오싱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와 닝보로 가는 길을 탔다. 샤오싱으로 닝보로 가는 길에는 위야오(余姚)를 지난다. 위야오는 왕양명의 학문적 고향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롱추안산(龍泉山) 아래에 둥지를 틀고 학문을 세운 후 학문 뿐만 아니라 군사가로서도 중국을 호령했다.

사실 그의 동선을 보자하면 교통이 편한 지금도 다니기 힘든 라인을 종횡무진하면서 군사가로서의 생활을 지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창사 위에루슈위앤(岳麓書院) 등에서 강학하는 등 수많은 학문적 성취를 남겼으니 정말로 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야오에는 또 명청시대 최고의 학자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의 묘가 있다. 강남 최고의 학자인 그를 강희제는 '삼고초려'에 가까운 자세로 수차례나 불렀다.

결국 그는 자신이 나가는 대신에 아들과 제자를 보내 명나라 역사를 기록하게 하는 등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지킨 인물이다. 그런 위야오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새로운 번성을 기대할 것 같다. 과거 항구도시이자 초기 개방도시인 닝보와 항저우 등에 밀렸던 위야오는 상하이 인근에서 항저우만을 가로지는 해상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가장 혜택을 볼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흠모한 도서관 톈이꺼

▲ 톈이거는 근, 현대 큰 침탈을 당했지만 아직도 귀중한 책들이 많다
ⓒ2007 조창완
닝보는 시내에까지 고속도로가 들어가 접근이 편했다. 사실 닝보(寧波)는 낯선 지명같지만 고려시대에 명주(明州)로 우리와 깊은 인연이 많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려사관((高麗使館)이라는 일종의 영사관이 있을 정도였다. 얼마전에 복원했는데 이번에는 찾지 못한다. 시내로 들어가 톈이꺼(天一閣)를 찾았다.

톈이꺼는 명나라 때에, 범흠(范欽)이 설치한 서고(書庫)다. 중국 문화저술가인 '위치우위'도 이 톈이꺼에 대한 회고를 상당 부분 할애 했다. 사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가장 흠모할 만한 천상의 도서관이라고나 할까. 톈이꺼가 풍기는 풍모를 지식인들의 동경을 사고도 충분했다.

▲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톈이꺼
ⓒ2007 조창완
범흠은 명대 가정(嘉靖: 1522~1566) 연간 사람이다. 27세에 진사에 입격한 후 섬서(陝西), 하남(河南), 운남(雲南), 복건(福建), 강서(江西) 등을 돌았다. 사실 왕양명에 못지 않은 동선을 가진 학자다. 양명은 이 길을 군사력과 철학으로 무장했자면 범흠은 지식과 책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만날 수 있는 책들을 대부분 수집했고, 수백년을 내다보고 톈이꺼를 지었다.

이후 책을 만고에 전하고, 재물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범흠의 뜻을 큰 아들 범대충(范大沖)이 이어받았고, 이후 수많은 이야기속에 서고는 지켜졌다. 그 가운데 벌어진 가운데 하나가 앞서 말한 황종희가 톈이꺼를 열람하고 싶어한 일이다.

그전만 하더라도 범씨 집안의 직계 남성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던 톈이꺼는 황종희를 들일까 하는 토의 끝에 열람을 허용했고, 이후 대학자로 추앙되는 인물에 대해서만 열람이 허용됐다. 하지만 근, 현대의 격변은 톈이꺼에게 치명적이었다. 외세의 탐욕과 절도 등으로 톈이꺼의 자료는 대부분 위기에 빠졌다.

그나마 일부가 보존된 것이 남아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톈이꺼로 향하는 골목은 대형버스는 들어가기 조차 힘들 만큼 좁았다. 그길을 지나자 작은 주차장과 톈이꺼가 나타났다. 사실 참가자들도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마지막 여정이려니 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책을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책 마니아들이었기에 톈이꺼는 상상 이상의 기쁨으로 다가왔다. 기자 역시 나에게 저런 서고가 있었다면 하는 탄성이 절로 일어났다. 정원 속에 조화된 서고, 공자 등 지성을 모시는 사당, 담장 하나 하나에 깃들인 지성에 대한 흠모 등이 너무나 쉽게 드러났고, 참가자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톈이꺼를 나섰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마음 한구석은 이미 톈이꺼에 남겨둔 이들이 많았다. 머지 않은 그 마음이 잘 있는지를 확인하러 오리라는 마음이었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참가자들은 닝보에서 저녁 비행기로 인천을 향했다. 기자는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사실 닝보에서 비행시간은 서울이 1시간 20분으로, 2시간 가량 걸리는 베이징에 비해 휠씬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