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경향신문 2007-04-26 09:39]
강화 외포리 선착장 앞 매점엔 새우깡이 박스째 쌓여 있었다. 석모도행 배 타러 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하나씩 집어들었다. 반은 먹고, 반은 갈매기 준다. 머리 위에서 맴돌던 갈매기들은 새우깡이 날아오자 잽싸게 낚아챘다. 새우깡과 갈매기, ‘웰컴 투 석모도’다.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에 배가 닿자 사람들이 파도처럼 섬 안으로 밀려들었다. 등산복에 지팡이를 짚은 아주머니, 하늘거리는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학생, 새끼손가락만 잡은 어색한 연인들…. 사실 석모도는 낯선 섬이 아니다. 대학 때 MT로, 회사 야유회로, 친구들과 소풍삼아 한번쯤 와 봤다. 이번엔 그냥, 자전거 한 대 빌리기로 했다. 윗옷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싶을 만큼 볕 좋은 봄날이니까.
선착장의 ‘자전거 대여’ 안내판 아래엔 자전거 예닐곱 대가 세워져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고개 넘어 해수욕장으로 오시란다. “자전거 정말 좋아하시는 분 아니면 넘기 힘드신” 고개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전득이 고개를 넘으며 자전거 대신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구불구불 비틀린 진짜 고개다.
석모도의 해안선은 41.8㎞, 일주도로는 19.8㎞. 자전거로 여행하기 딱 좋은 크기다. 간척지가 많아 다른 섬에 비해 평지가 많고 언덕이 적다. 버스 시간과 노선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 한 대면 자가용이 생긴 듯 든든하다. 게다가 석모도 자전거 대여업은 ‘고객 맞춤 배달’ 형태. 전화 한 통이면 원하는 곳에 갖다 주고, 가지러 온다. 석모도에 자전거 대여점이 처음 생긴 것은 8년전. 현재 3개 업체가 영업한다. 평일엔 10여명, 주말엔 100명이 넘게 탄다.
민머루 해수욕장에서 유사 산악자전거, ‘철티비’를 빌렸다. ‘이동식 자전거 대여점’이라고 쓴 트럭에서 자전거를 내려주며 강두석씨(31)가 코스를 추천했다.
“보문사까지 천천히 가시면 30분 걸려요. 자전거 달리기엔 한가라지 고개 넘어 상·하리 쪽이 좋죠. 평야 사이로 도로가 뻗어 있어요. 여름에 오시면 해바라기가 쫙 피어 있는데…. 섬 일주는 쉬지 않고 달리면 2시간쯤? 구경하면 5~6시간 잡아야죠.”
해수욕장에서 나오는 길 오른쪽은 폐염전이었다. 1950년대 조성한 23만7000평의 거대한 염전은 소금 생산을 멈춘 지 4년째다. 20㎏ 한 봉지에 타 지역의 2배 가까운 3만원을 받을 만큼 질 좋기로 유명했는데, 밀려오는 중국산을 이기지 못했다. 염전엔 소금물 대신 깨어놓은 바닥 타일과 먼지만 가득했다. 인천시와 강화군에 따르면 이 자리엔 2009년까지 골프장과 콘도가 들어선다.
보문사를 향해 느릿느릿 페달을 밟았다. 남의 집 빨랫줄에 걸린 작업복, 햇볕에 말라가는 운동화, 솜이 튀어나온 의자, 시멘트 마당에서 잠든 누렁이가 보인다. 자동차로는 스쳐 지나갈 뿐인 풍경이 자전거 위에선 느릿느릿 흐른다. 이따금 하얀 왜가리가 푸드득 날아올라 반대편 논밭으로 훠이훠이 날아갔다. 서울에서 자전거 탈 때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복면강도’ 복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배꼽까지 들어오게,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보문사 입구에서 나물이며 콩을 팔던 할머니께 자전거를 맡겼다. 잠금줄이 없어 하마터면 자전거 끌고 절까지 올라갈 뻔했다. 절 앞 식당마다 시식코너를 만들어 쑥 튀김 한 점에 인삼 막걸리 한 모금을 권했다. 쑥을 탈탈 털어 반죽 묻혀 튀겨내는 튀김은 고소하고 막걸리는 달콤했지만, ‘음주운전’은 안되는 법.
보문사는 절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었다. 볼거리는 많지만 문화재는 없다. 극락보전의 총천연색 문살은 어색했고,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윤장대도 새것 냄새가 폴폴 났다. 보문사를 일약 전국 3대 기도도량으로 만든 마애불은 41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마애불 앞에서 뒤로 돌면 서해 바다. 일몰 감상 포인트라는데 해가 지려면 4시간은 남았다. 한밤중에 오르면 멀리 인천 시가지까지 한눈에 보인단다.
다시 돌아온 일주도로에는 한가라지 고개가 산처럼 막아섰다. 순순히 자전거에서 내렸다. 힘 빼지 말고 끌고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나 ‘끌바’(‘자전거를 끌다’는 뜻의 ‘끌고 바이크’의 줄임말) 구간은 무려 15분 동안 이어졌다. 목 마르고, 배 고팠다. 한강 자전거도로에서 자전거 좀 타 봤다고 20㎞쯤이야 하고 얕본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진달래꽃까지 피어있는 길인데, 예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갯마루에서 땀을 씻으니,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 아득했다. 저 방향에서 올라왔으면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석모도 자전거 여행은 시계 방향, 언제나 시계 방향을 고수하자.
상·하리는 석모도의 ‘서북부 평야지대’. 눈 닿는 끝까지 반듯한 직선 도로가 이어진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자전거 아우토반’이다. 다리에 힘을 주고 페달을 굴렸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핸들에서 손을 떼고 양팔을 벌리고 싶을 만큼.
이 작은 섬에 어떻게 이런 평야가 생겼을까? 석모도의 행정지명인 삼산면의 ‘면지’에 따르면 보문사가 있는 상봉산(316m)과 이쪽 상주산(264m)은 원래 별개의 섬이었다. 임진왜란 무렵 두 섬 사이의 물이 빠지고 ‘스스로 뻘이 생겨나’자 둑을 쌓아 밭을 만들었다는 것. 1706년 둑이 완공되면서 ‘상·하리 평야가 이룩돼 한차례 지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300년 된 평야 사이로 자전거는 달렸다. 갈아엎은 밭은 아직 검붉었지만, 줄 맞춰 심어놓은 보리는 벌써 초록색으로 넘실거렸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평범한 시골마을, 하리를 지나 선착장으로 다시 내달렸다. 저기 미용실, 슈퍼, 담배 같은 낡은 간판들이 나왔다. 삼산면 소재지다. 무릎도 시큰거리고, 엉덩이도 아팠다. 만물상회 앞에 앉아 다리를 두드렸다. 이제 그만 회수 요청 전화를 걸까, 이대로 석포 선착장까지 달려볼까. 아, 그것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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