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미안하다, 너를 그렇게 떠나보내서

피나얀 2007. 6. 15. 19:52

 

출처-오마이뉴스 2007-06-15 15:42

눈을 뜨니 스캐그웨이(Skagway)였다. 배는 이미 부두에 정박해 있고 바닷새 수십 마리가 아침 하늘을 날아다닌다. 시간상으로는 새벽이라 불러야 옳으나 해 뜬 지 이미 오래, 아침도 한참 늦은 아침이다. 줄곧 우리를 따라다니던 비는 그의 여정을 다하고 어느 항구에 닻을 내렸는지 더 이상 오지는 않는다. 배에서 바라다보이는 스캐그웨이 항 너머 하늘에서, 오랜만에 푸른 기운을 보인다.

▲ 배에서 바라보는 Skagway
ⓒ2007 제정길
스캐그웨이는 작고 한적한 시골 어촌 마을 같다. 눈 덮인 산에 폭 싸인, 한때는 골드 러시의 바람을 타고 2만 명의 인구가 북적거린 알래스카 제일의 도시였으나 골드 러시의 퇴장과 함께 인구도 줄어 지금은 겨우 700여 명의 주민들만 살고 있는 조그만 타운이다.

골드 러시 때의 금을 향한 인간의 무서운 집념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고 이제는 되려 그 흔적들을 되팔며 살아가는 작은 마을 스캐그웨이, 그곳에 프린세스호는 한나절을 묵는다.

아침을 대충 먹고 오전 8시에 하선하여 예약하여둔 유콘(Yukon) 및 화이트 패스(White Pass) 탐험 투어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는 부두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흔히 모터 코치(Motor Coach)라 불리는 대형 관광 전용버스였다. 차 입구에서 20대의 동양계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 여권을 검사하고 있다. 오늘 가려는 유콘지역은 캐나다 땅이기 때문에 여권이 있어야 한단다.

▲ 정차 중에 승객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그녀
ⓒ2007 제정길
그녀는 승차하는 50여 명의 관광객 중 유일한 한국인인 내 여권을 보자 "한국서 오셨군요" 하고 완벽한 네이티브 영어로 미국식 미소를 곁들이며 말하였다. 혹시 교포이려나 하는 나의 예상은 그의 친절하나 사무적인 태도 앞에 여지없이 날아가 버렸다.

차는 넓고 쾌적하였으며, 그녀의 경쾌하고 유머스런 안내 멘트는 며칠간의 선상생활에 지친(?) 승객들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안내자이자 여행 가이드이고 운전기사였다. 차는 오전 8시 30분에 부두를 출발하여 몇 발짝도 안 되는 스카그웨이 시내를 거쳐 바로 산악지대로 진입하였다.

▲ 산마루를 돌아 달리고 있는 White Pass 경관 기차
ⓒ2007 제정길
길은 산 모롱일 따라 뱀처럼 꼬불거렸고 산은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여 아차 한눈 팔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였다. 그 유명한 화이트 패스 트레일이었다. 맞은편 산 중턱에는 화이트 패스 경관 열차가 숨을 헐떡이며 모롱이를 돌아나가고 있고, 차 안에서는 운전기사이자 가이드인 그녀가 연방 사람들을 웃겨 우리 모두를 숨가쁘게 만들었다.

그녀의 영어 발음은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처럼 낭랑하고 미려하게 내 귀에는 들렸다. '저 여자는 미국 태생이구나. 생김새로는 한국계처럼 보이는데, 아닌 거 같고…. 설령 한국계이더라도 교포 2,3세쯤은 되는 모양이다' 하고 나는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그의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빠른 속도의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하자 괜히 쓸데없는 공상이 드는 거였다.

▲ 눈에 싸인 Yukon 지역의 산들
ⓒ2007 제정길
얼마를 더 가자 캐나다 국경이 나타났다. 국경이라야 을씨년스런 검문초소 하나 있는 게 전부였다. 세관원인가가 차에 올라와 여권과 사람 얼굴을 쓱 한번 훑어보고는 끝이었다. 간단해서 좋았다.

차는 다시 달려 배닛(Bennett) 호숫가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볼 일도 보고 사진도 찍게끔 20분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 호수는 크고 물빛은 푸르며 산들은 물 속에 드러누워 더욱 희게 빛났다. 사진을 찍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사귐성이 좋은 '동행'은 '기사 아가씨'에게 사진 좀 찍어 달라며 말을 붙였다.

▲ Bennett 호수
ⓒ2007 제정길
사진을 찍히고 카메라를 건네 받으며 나는 내심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한국사람처럼 보이는데, 아니신가 보죠?"

물론 서툰 영어로서다. 그녀는 별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남한(외국사람들은 꼭 이렇게 말한다)에서 태어났어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세요? 나는 미국 태생인 줄 알았어요."


나는 그녀가 교포 1.5 세대인 것으로 짐작하고 아부성 발언을 하였다. 그녀는 잠시 호수를 흘깃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입양되었어요, 아기 때. 1980년에."

▲ 독수리(흰 머리 독수리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늘을 날다.
ⓒ2007 제정길
물새 한 마리가 호숫가를 빙빙 돌다 숲으로 날아갔다. 구름 잠깐 멈춘 듯하더니 다시 흘렀다. 차도 다시 출발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명랑한 목소리로 주변 경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구르는 듯한 말소리는 내 귀에까지 오기는 했으나 진입하지는 못하고 귓바퀴를 타고 굴러내려 가버리고 대신 지나간 시절에 대한 상념이 내 머리에 굴러들어왔다.

1980년은 내가 미국에 처음 출장을 가 본 해였다. 난생 처음 미국이라는 땅에 간다는 설렘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희망에 부풀어 탔던 그 비행기에, 어쩌면 강보에 싸인 그 아이도 같이 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울면서….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 차창으로 보이는 눈, 눈 덮힌 산.
ⓒ2007 제정길
정치꾼들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 권력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광주사태를 일으켰고,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고 배고픈 공원들을 한 푼의 저임금으로 철야의 공장으로 몰아붙였고, 어중간한 소시민은 제 먹고 살기에 바빠 남의 코가 깨져도 관심을 보이지 않지 않았든가. 그때 저 아이는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이 낯선 곳까지 떠내려 와야 했던 것 아니었든가.

카리보(Caribou)라는 작은 마을에 중식을 위하여 정차하였다. 식당은 몇 백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으나 시청은 단칸짜리 하꼬방만 하여 이채로웠다. 메뉴는 닭고기 하나였고 식사는 엉성하나 마을의 분위기와 어울릴 만은 했다.

▲ 신비한 에메랄드 빛깔의 호수
ⓒ2007 제정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물색 갈이, 비취보다 더 푸른 호수를 둘러서 카크로스(Carcross)라는 타운에 들러 골드러시 때의 여러 흔적들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다니지 않는 녹 쓴 철로며, 오래 전에 끊어져 버린 허물어져 가는 다리며 모든 것은 재색으로 탈색되어 그곳에 화석처럼 걸려 있었다. 금이 무엇인지 금을 위하여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다 버릴 것 같았던 그들의 헛된 욕망들은 그런 식으로 박제되어 남아 있었다.

▲ 욕망은 박제되어 다리위에 걸려있다.
ⓒ2007 제정길
버스는 최종으로 프레이져(Fraser)에 멈춰 섰다. 여기서 우리는 기차로 갈아타고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그녀는 승객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나누며 그들을 기차로 안내했다. 그녀의 친절함, 그녀의 당당함에 나는 오히려 압도당한 느낌이었다. 헤어지며 나는 물었다. 한국에 한번 오지 않겠느냐고. 그는 짧게 대답했다. 두 번 갔다 왔다고.

▲ 승객을 기차에 인도하며 배웅인사를 하는 그녀
ⓒ2007 제정길
왜 그런지 꼭 이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정말로 손을 붙잡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입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나보다도 더 어른스러웠고 그녀는 나보다도 더 의젓하였다. 나를 기차 타는 데까지 가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녀는 가만히 말하였다. "안녕히 가세요."

우리가 모른 척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아이는 이제 이 이역만리 땅에서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얼른 뛰어가 기차에 올라탔다. 가슴 어느 편에서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