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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아련한 추억이 있어 더 아름다운 꽃을 만나다

피나얀 2007. 6. 26. 21:35

 

출처-2007년 6월 26일(화) 오후 1:30 [오마이뉴스]

 

 

▲ 털중나리-남한산성(6월 24일)

 

ⓒ2007 김민수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오랜 가뭄으로 인해 이번 장마의 초입에 내린 비는 감로와도 같게 느껴졌고, 달아오르던 대지도 장맛비에 주춤하니 시들하던 도시의 나무들도 힘을 얻은 듯했다.

어떤 장소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저 무심코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고, 어느 책의 소재가 되어 회자되면 특별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또 어떤 추억이 있으면 아무에게도 관심거리가 아닌 그 어느 곳이 당사자에게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남한산성, 나에게 그 곳은 아주 특별한 곳이다. 유년과 청소년기를 지난 대학 초입까지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유년 시절에는 남한산성 계곡에서 가재를 잡고, 겨울에는 칡을 캤고, 고등학교시절 거여동에서 출발하여 천호동, 신장, 은고개를 경유하여 남한산성, 성남으로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는 환상의 코스였다. 그리고 대학 1학년, 첫 여름방학을 맞이하던 날 몇몇 친구들과 남한산성을 찾았다. 때마침 잘 익은 오디(뽕나무 열매)와 한창 피어난 털중나리가 우리를 반겼다.

ⓒ2007 김민수
유년시절 남한산성 계곡에는 가재가 많았다. 흙도 부들부들해서 연장만 있으면 쉽게 알칡을 캘 수 있었다. 고교시절 자전거를 대여해서 떠난 하이킹, 함께 간 범생이 친구의 배낭에는 약간의 일탈(?)을 위한 맥주도 두어 병 들어 있었다.

계곡마다 물이 풍성했고, 사람들이 발길이 뜸한 곳도 많아 깨를 벗고 수영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대학시절에는 향기가 별로 좋지 않은(털중나리의 향기는 고린내 같다) 털중나리꽃을 한 웅큼 꺾어 함께 동행한 여자친구에게 선물했다가 난감해했던 친구도 있었다.

이런저런 추억들 속에 함께 했던 이들은 지금 40대 중반을 넘겼다. 몇 몇 친구들은 먼저 세상과 이별을 한 친구도 있지만….

ⓒ2007 김민수
아직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설의 제목때문인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남한산성 그 곳에 가고 싶었다. 훼손되지만 않았다면 그 곳에 털중나리도 피어 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잘 익은 오디를 달고 있는 뽕나무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나는 이미 카메라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을 찾았을 때 이런저런 보수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내가 자주 찾았던 그 곳은 무성한 풀밭으로 변해 있었다. 세력이 좋은 딸기나무와 억새 등이 지천이다. 반 바지를 입고 온 것을 후회해도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 풀섶 사이에 털중나리가 피어 있었던 것이다. 종아리를 긁혀가며 땀을 뻘뻘 흘려 그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어렴풋이 나리꽃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그 꽃이 털중나리임을 알았다.

ⓒ2007 김민수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그 곳, 옛날의 길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전망이 좋은 곳이라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길이 있었다. 산해박, 기린초, 할미꽃 등의 흔적과 지금껏 만난 것 중 가장 실한 꿩의다리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명당에 자리를 잡고 피어 있었다. 화들짝 피어난 꿩의다리를 보고서야 이른 봄 쑥쑥 올라오는 줄기를 꺾어 봄나물로 먹었던 것이 그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무심한가 보다. 나물로 몸에 부지런히 모시면서도 그가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니….

ⓒ2007 김민수
장마철이라 습기까지 머물고 있는 6월의 풀섶은 후덥지근했다. 털중나리를 담으려 풀섶에 누웠더니만 땀이 온 몸에서 줄줄 흐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함, 흙과 하나 됨의 경험이다.

도시에서 살다보니 양반(?)이 되어 점잖을 떨게 되고, 이전보다 사진을 찍을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점점 흙과 멀어진 삶에 익숙해졌는가 보다. 꽃이란 서서도 보고, 무릎을 꿇고도 보고,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봐야 제 맛인데. 아주 오랜만에 6월의 햇살이 내리쬐는 풀섶에서 시체놀이(?)를 하니 그간 응어리졌던 것 같은 속내가 확 풀린다.

▲ 남한산성 남문쪽의 그 어느 곳
ⓒ2007 김민수
남한산성 남문 그 어딘가인 이 곳을 사진만 보고도 '아! 거기'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문으로 들어가면 제법 아늑한 공간도 있고, 성벽을 따라 망을 보고 활을 쏘았던 굴들도 10개 남짓 있다.

그 중에 어느 한 곳에는 뽕나무가 있으며(추억을 더듬으며 서너 개만 따먹었으니 아직도 많이 남았을 것이다), 시원한 그늘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커다란 신갈나무도 있다. 맨 처음 그 곳을 찾았을 때 아이들 하나 올라가기에도 작었던 신갈나무, 이제 그네를 달아도 좋을 만큼 실한 나무가 되었다.

세월, 그렇게 쌓여가는데 오직 꽃들만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