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펌] 여길 가야 경주 가봤다 할 수 있지 [02]

피나얀 2005. 12. 13. 12:30
 


 

 

출처-해결사

 

 

 

 

▲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 전경
ⓒ 문일식
여섯 번째는 노동동 고분군에 있는 봉황대입니다. 노동동 옆에는 노서동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고, 길 건너편으로는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릉원에는 사람들의 북적임이 가득인 반면,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에는 적막하기 그지없습니다.

대릉원에는 그 유명한 천마총이 자리잡고 있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길을 주지만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은 눈길을 끌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일까요?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인기에 눌려 서러운 2인자에 머물러 있더라도 저에게는 최고의 고분이었습니다.

 

▲ 봉황대를 걸어가시는 어느 할머니
ⓒ 문일식
봉황대….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만약 고분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누가 봉황대를 고분이라고 했겠습니까? 작은 언덕위에 수령이 수백 년은 됨직한 나무들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고분이란 생각은 당연히 할 수 없었을 테지만, 봉황대는 고분이었습니다.

고분과 고분사이로 민초들이 살고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봉황대는 무덤으로서가 아니라 민초들을 보듬어 주는 듬직한 언덕이었던 셈입니다.

 

▲ 임해전지와 안압지의 야경
ⓒ 문일식
일곱 번째는 임해전지와 안압지입니다.

안압지의 유물들은 대부분 연못 속의 뻘 속에 묻혀 있어서 유물들이 상하지 않고 보존상태가 양호하게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안압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문무왕 14년인 674년에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고 하는 문헌상의 기록입니다.

임해전지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서 지은 궁궐의 이름이 임해전이라는 명칭을 가졌고, 그 궁궐이 파괴되고 터만 남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 임해전지와 안압지의 야경
ⓒ 문일식
안압지는 나라에 경사가 있어 연회를 베풀거나 귀한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곳이고, 동궁인 임해전과 같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안압지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화려한 궁궐이 사라져버린 쓸쓸한 터에 오리와 기러기만 노닌다는 의미로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을 써서 안압지라고 불렸다 합니다. 따라서 임해전지와 안압지는 따로 불리기보다는 같이 불려야 맞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가보면 그 옛날 안압지 위에 띄워놓고 놀았던 목조 배가 한 척이 있습니다. 목조 배임에도 불구하고 못 바닥에 가라앉아 진흙 속에 갇힌 덕에 상하지 않고 출토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물에 씌었던 기와편과 난간 등도 출토되었고, 왕실에서 쓰였던 수많은 생활용품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의 화려함이 복원된 후에도 여지없이 느껴지는 곳이고, 아울러 저녁때 야경이 어우러진 임해전지와 안압지는 최고의 절경이라 하겠습니다.

 

▲ 불국정토를 새긴 불국사의 전경
ⓒ 문일식
여덟 번째는 죽어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인 불국사입니다. 하나의 건축물로 불국정토를 만들어 놓은 그 의미가 지극히 큰 사찰입니다.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으로 이어지는 극락전 영역과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으로 이어지는 대웅전 영역, 이 영역을 감싸고 있는 회랑과 뒤편으로 이어지는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 등의 영역 등 어느 하나 그냥 지나쳐 볼 곳이 아닙니다.

불국사는 폐허가 되어버린 뒤 복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은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는 찾아오지만 북적일 뿐 그 의미를 되새기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입니다.

 

▲ 광학부도 중대석의 아름다운 구름과 꽃문양
ⓒ 문일식
비로전에서 나한전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전각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부도가 한 기 서 있습니다. 일명 광학부도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까지 반출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부도입니다. 부도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일본사람들이 분명 탐을 내고도 남을만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베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부도의 중대석인데, 구름과 꽃문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윗부분인 탑신은 4곳을 파내어 감실을 만들고 사방불로 새겨 넣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뭉툭하다고 느껴지는 부도와는 달리 잘빠진 석등의 모습과 오히려 닮아있는 듯 합니다. 이 부도는 보물 6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아름다운 풍경만 간직하고 있는 사천왕사지
ⓒ 문일식
아홉 번째는 사천왕사지입니다. 사천왕사는 부처의 힘으로 당이라는 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뜻에서 지어진 사찰입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신라는 삼국통일을 했지만, 당나라는 신라마저도 굴복시켜 한반도를 지배할 야심을 꿈 꿨습니다.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의상대사로부터 당나라의 침략야욕을 전해들은 문무왕은 사천왕사를 짓기로 결정하고 준비하던 차에 당나라군의 출병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에서는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행해 바다로 건너오려던 당나라 수군을 격퇴시켰다고 합니다. 다소 황당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지어진 사천왕사였습니다.

 

▲ 숨은 그림찾기 하듯 간간히 찾을 수 있는 사천왕사의 흔적
ⓒ 문일식
사찰의 흔적은 석조부재 몇 개 찾은 게 전부였지만, 대신 가을 내음이 물씬 풍기는 풍경을 많이 만났습니다.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억새가 하늘하늘 거리고, 이름모를 흰 꽃들이 지천에 피어 흐드러졌습니다. 가을의 완연한 날씨에 푸른 하늘 아래로 흐르는 구름들 또한 풍경에 한 몫을 했습니다.

사천왕사지는 경부선 철도가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이 철로를 건너 좁은 콘크리트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릉을 갈 수 있습니다.

 

▲ 보문사지가 있는 황금들녁
ⓒ 문일식
마지막 열 번째는 보문사지와 진평왕릉입니다. 중생사 가는 길에 있는 문무대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을 보고 좁은 콘크리트길을 따라 오르면 얕은 낭산을 빠져나가는 내리막길입니다. 아래쪽으로는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누런 황금색 들판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람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는 모습과 바람에 휩쓸려 일렁거리는 벼들의 속삭임 하나하나가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한동안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곳이 보문사지였고, 더 멀리에는 진평왕릉이 아스라이 보였습니다. 보문사지에는 당간지주 2기와 석조가 논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나고 나서야 논으로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소나무의 시중을 받고 있는 진평왕릉
ⓒ 문일식
진평왕릉은 그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봉분 하나만 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크게 자리 잡고 마치 수문장 역할을 하는 것 같고, 왕릉 안쪽에 들어서면 봉분보다도 작은 소나무가 왕릉을 향해 힘껏 굽어져 있는데 마치 왕을 시중드는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에서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느티나무가, 진평왕 자신의 곁에는 시중을 들어주는 소나무가 있으니 스스로 편안한 위로감이 들었을 겁니다.

경주는 누군가는, 그리고 언젠가는 한번쯤 꼭 와봐야 할 멋진 여행지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관심만 있어도 경주여행은 두 배 세 배 즐겁고 유익한 여행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경주를 통틀어 10곳만을 뽑아서 서운해 할 곳들이 더없이 많을 것이지만, 대체로 생각지도 못한 감동과 느낌이 있었던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냥 둘러보기만 하려했던 곳인데 지금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득 수많은 여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납니다.

 

3일 간 경주 여행 일정입니다. (지난 10월 1일-3일까지 3일간 다녀온 여행입니다.)

이견대→문무대왕릉→감은사지→장항리사지→석굴암→구정동 방형분→영지,영지석불→괘릉→통일전→서출지→남산리 쌍 3층석탑→보리사 석불좌상→탑골마애조상군→감실부처→국립 경주박물관→일박

반월성→석빙고→계림→내물왕릉→경주향교→첨성대→노서동노동동 고분군→대릉원→오릉→나정→양산재→남간사지 당간지주→포석정→삼릉→배리삼존석불입상→분황사→황룡사지→미탄사지 3층석탑→황복사지 3층석탑→임해전지(안압지)→일박

불국사→신문왕릉→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능지탑→보문사지→진평왕릉→태종무열왕릉→서악동고분군→김유신장군묘→상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