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제주는 봄 봄 봄] 비양도 봄날은 그렇게 다가왔다

피나얀 2006. 2. 25. 18:07

 

 


제주를 찾을 때마다, 한림의 협재 백사장을 거닐 때마다 시선을 붙들어 매놓던 섬 하나가 있었다. 몰디브 바다 부럽지 않은 옥색의 영롱한 물감을 풀어내는 아담한 섬, 비양도.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을 닮은 그 섬은 물빛 만큼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다. “저 섬엔 누가 살고 있을까.”

 

벼르고 별러 찾아간 비양도는 지난해 드라마 ‘봄날’로 이미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샛노란 유채꽃으로 제주의 봄이 시작된다지만 비양도는 언제나 ‘봄날’이다. 섬을 감싼 에메랄드빛 바다는 누가 뭐래도 분명 봄의 빛깔이다. 1년 365일 그 물빛을 빨아들이고 선 비양도는 사철 ‘봄의 섬’이고 ‘봄날’이다.

 

비양도로 들어가는 배는 한림항에서 닻을 올린다. 항구의 한쪽 편 푸른색의 허름한 ‘도항선 계류장’ 간판이 비양도로 가는 이정표다. 관광지로 거듭난 우도에 비해선 선착장이 초라하다. 40여 명 태우면 꽉 찰 작은 배가 오전 9시와 오후 3시, 하루에 두 번만 뜬다. 한여름 피서객이 몰리면 중간에 두서너 번 증편한다지만 지금은 오전 배로 들어가면 오후 배가 올 때 까지 마냥 기다려야 한다.

 

연초록의 낮은 바다 위를 배는 스치듯 내달렸고 15분 만에 섬에 도착했다. 60여 가구 16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 비양도. ‘동국여지승람’은 고려 목종 5년(1002년) 제주 바다에 산이 솟아나왔는데 산꼭대기에 4개의 구멍이 뚫리고 닷새 동안 붉은 물이 흘러나온 뒤 그 물이 엉키어 기왓돌이 되었다고 적고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비양도는 이제 1,000년이 조금 지난 섬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젊은 땅인 셈이다.

 

섬을 구경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섬의 꼭대기인 비양봉 오름에 오르거나 섬을 빙 둘러 조성된 해안길을 따라 바다 풍경을 가슴에 담는 방법이다. 우선 산으로 올랐다. 마을 골목길이 오름 산책길로 이어진다. 그물로 담을 쌓은 밭들을 지나 오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한길이 넘는 억새는 긴 긴 겨울 바람에 마르고 또 말라 바스러질 듯 서걱거린다. 억새 사이로 난 호젓한 오솔길로 ‘천년의 시간’과 동무하며 걷고 있는데 갑작스레 ‘푸드덕’ 뭔가가 뛰쳐나온다. 흑염소 서너 마리가 이방인을 노려보고는 뒷걸음질 친다. “내 땅에 뭐하러 왔느냐”는 눈빛이다. 긴장감이 억새밭 너머 시누대 군락까지 퍼졌는지 이번에는 꿩이 또 갑자기 날아올라 놀라게 한다.

 

20분 만에 비양봉 정상에 올랐다. 그 꼭대기에는 하얗고 아담한 등대가 하나 서있다. 꺼칠한 표면의 허름한 등대가 외로이 서서 비양봉의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등대에 등을 기대고 서니 건너편 제주 본섬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아스라한 윤곽의 한라산과 경주의 왕릉을 닮은 오름 능선이 편안하다. 제법 포실해진 봄볕에 저절로 눈이 감기운다.

 

산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해안 일주도로를 걷는다. 코끼리를 닮은 커다란 바위에는 물새가 떼를 지어 앉아 봄바람을 맞고 있고, 갯바위에 세워진 작은 등대 가에는 나이 든 해녀가 연신 물질이다. 물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어~허~” 내뱉는, 휘파람 소리를 닮은 그들의 호흡 소리에는 생의 고단함이 담겨있다.

 

특이한 화산지형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암기종’ 주변은 돌공원. 바다에 널브러진 돌들 위로 유독 우뚝 솟은 바위가 하나 있다. ‘애기 업은 돌’이라 부르는 이 바위는 아기를 업은 임신부가 남편을 기다리다 굶주렸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얼추 섬을 한바퀴 돌 때쯤 마을 옆에 ‘펄낭’이라는 못을 만난다. 바닷물이 스며들어와 만든 염습지다. 청둥오리떼가 볕을 쬐며 둥실 떠있는 모습이 마을의 낮은 지붕 선들과 어울려 평화로워 보인다.

 

산에 오르고 섬을 한바퀴 다 돌아도 겨우 2시간. 배가 오려면 4시간이 더 남았다. 그토록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건만 비양도에서의 시간은 주체할 수가 없다. 익숙치 않은 ‘느림’에 당혹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비양도가 아니면 어디서 또 느림의 미학에 빠져들겠는가.

 

 


방파제에 늘어선 낚시꾼들을 기웃거리고, 비양분교의 자그마한 운동장을 거닐어보고…

비양도의 봄볕은 그렇게 느리게 느리게 가슴으로 번져왔다.

 

 

 

 

비양도(제주)=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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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일보 2006-02-23 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