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탑 꼭대기의 황금은 순금일까, 도금일까?

피나얀 2006. 3. 3. 22:02

 

 

▲ 수덕사 대웅전과 황금탑
ⓒ2006 이승철
3·1절을 맞아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을 찾았다.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쌀쌀한 날씨에 눈발이 날리고 있어서 상당히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버스가 충청도 땅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거짓말처럼 날씨가 상당히 맑아지고 있었다.

수덕사 입구의 주차장에 내려서니 그 사이 날씨는 포근한 봄날이 되어 있었다. 초봄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여 나무와 꽃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봄날의 변덕이라니, 그래서 때로는 너무 일찍 피운 꽃들이 눈 속에서 움츠러들기도 하는 것이다.

수덕사 입구는 그 유명한 이름만큼이나 상가도 대단하였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나지막한 덕숭산, 그러나 사찰입구치고는 정말 대단한 상가다. 넓은 주차장과 함께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며 음식점들이 천년고찰 수덕사의 유명세를 실감나게 하였다.

 

▲ 정적에 싸인 수덕여관
ⓒ2006 이승철
그 상가 사이를 뚫고 절 입구에 들어서니 왼편에 '수덕여관'이라는 간판을 단 초가집 한 채가 이채롭다. 이 수덕여관은 수덕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개화기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여성들 중에서 김일엽과 나혜석의 자취가 묻어있는 명소가 아니던가.

"아니 웬 여관이 이런 곳에 있지? 그것도 초가집이라니?"

일행 중 한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소문난 사찰 앞의 초가집 여관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때 이응로 화백의 부인이 운영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던 여관이다. 김일엽이 출가하여 이곳 환희대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왔던 나혜석이 묵었던 여관이기도 하다.

김일엽과 나혜석, 한때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었던 두 사람이다. 그러나 혜석은 일엽을 찾아와 그의 소개로 만공선사에게 문하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거절당하고 돌아간다.

그 유명세에 힘입어 한때는 많은 문학인들의 발길이 잦았던 수덕여관도 이제는 퇴락한 모습이 역력하다. 수덕사 쪽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세워진 파란 철대문은 굳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 수덕사 계단 입구의 돌사자상
ⓒ2006 이승철
일주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서니 대웅전까지는 층층이 오르는 계단 길이다. 어느 계단 입구를 지키는 돌사자는 얼굴이 사자의 얼굴인지 사람의 얼굴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생겼다. 사천왕문 안의 사천왕상도 거대한 모습이지만 무섭다기보다 스스로 놀라서 눈을 부릅뜬 표정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웅전 앞에 도착하니 나이 든 사람들은 꽤 힘이 드는 모양이다. 한눈에 보아도 고색창연한 이 대웅전은 국보 49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중의 하나다.

이 수덕사는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554~597) 때 고승 지명이 세운 것으로 전한다. 고려 공민왕 때 중수하였으며 조선말 고종 2년에 만공이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마당의 양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과 청련당이 있고 두 개의 높고 낮은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낮고 부서진 탑이 보물로 지정된 3층 석탑인데 근래에 세운 듯한 높다란 석탑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특히 그 석탑꼭대기는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색 상륜부가 화려한 모습이다.

 

▲ 사천왕상
ⓒ2006 이승철
“저 탑 꼭대기 저거 황금이잖아. 저게 순금일까? 도금일까?”

관광객으로 보이는 신사들 두 명이 탑을 바라보며 의문을 던진다. 그러자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거 순금 아닐까요? 묵직해 보이는 느낌이 순금일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 관광객 중의 한 사람이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도금일 것 같은데요. 저게 높아서 그렇지 저 정도면 엄청난 금덩어리인데 설마 순금이겠어요?”
“자! 올라가자고, 뒤처지지 말고.”

우리 일행이 계속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자 다른 일행이 그를 재촉하여 자리를 떴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고 보면 대웅전의 연륜도 그만큼 깊으리라. 그 대웅전의 옆모습을 살펴보니 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이어준 목재의 조립과 지붕의 선이 환상적일 만큼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절 뒤로 돌아 산으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돌계단 길이다. 그 돌계단 수가 자그마치 1020계단이란다. 계단 오르기에 질렸던지 뒤따라오던 노인들 대부분이 오르기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계단 길옆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 대웅전 건물의 옆모습
ⓒ2006 이승철
산이 높지 않고 봄 가뭄이 심하여 흐르는 수량은 아주 적은 편이지만 바위투성이 계곡은 수려한 풍경이다. 그렇게 정혜사에 오르니 전망이 시원하다. 앞쪽으로 탁 트인 시야에 주차장과 상가, 그리고 낮은 산들과 골짜기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정혜사 마당에는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이끼로 뒤덮여 있는데 그 바위들을 기단으로 두 개의 돌탑이 든든하게 서 있는 모습도 흥미롭다. 일엽의 스승인 만공선사가 세웠다는 정혜사 뒤에는 푸른 소나무 숲이 청청한 모습이다.

일엽도 스승을 만나러 이곳에 올 때마다 저 소나무 숲을 보았을까? 생전의 김일엽은 주로 근처에 있는 환희대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전한다. 일엽은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을 나오고 22세에 40세의 미국유학파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의 명문가 청년과 통정하여 이혼당하고 사생아를 출산하였다.

 

▲ 정혜사 마당의 이끼 뒤덮인 바위와 돌탑
ⓒ2006 이승철
그 아들을 일본 남자에게 주고, 귀국하여 친구의 연인과 삼각관계가 되기도 하였고, 독일유학파 박사와 또 다른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다. 또 그 남자가 불교로 출가해 버리자 다른 재가승(在家僧)과 동거하였던 일엽이고 보면 그 사랑의 추구도 누구보다 치열했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은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 하게 되옵니까?
내 것 네 것 가려질 길 없사옵고
조건이나 댓가가 따져질 새 어디겠어요?

혼마저 합쳐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저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김일엽의 시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모두


 

▲ 만공탑
ⓒ2006 이승철
당대에 시대를 앞서가던 신여성이요 페미니스트였던, 어떤 면으로는 상당히 번잡하기까지 한 남성 편력을 가졌던 이 여인이 진정 사랑하였던 이 시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불타는 사랑과 정열을 지닌 지식인이요 문학인으로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기도 하였고, 어린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하기도 하였던 일엽이다.

그러나 모든 욕망을 접고 입산하여 스승 만공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한때는 글쓰기까지 중단하였던 일엽이지만, 말년에 어느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갔을 때 잠깐 기다리도록 한 다음 얼굴과 옷매무새를 매만졌다는 일화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정혜사를 나와 정상으로 오르는 양지바른 길가의 밭에는 파릇파릇 새싹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엊그제 추위와 봄 눈 속에서도 계절은 어김없이 봄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정상까지는 10분 거리다. 계단 길이 아니어서 오르기도 한결 쉬운 편이었다.

정상에는 3·1절 휴일을 맞아 산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먼저 올라와 있었다. 정상이래야 그리 높지 않은 해발 495m, 그러나 주변에 더 높은 산들이 없어 휘휘 둘러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골짜기 아래로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기념관도 바라보이고, 그 골짜기 너머 왼편으로는 가야산이 우리를 마주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잠깐 땀을 식히고 하산 길에 나섰다. 하산 길에서 내려다보는 수덕사의 지붕과 담장의 선이 아름답기 짝이 없다. 역시 우리 고전의 건축양식은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아름다운 것이다.

 

▲ 덕숭산 정상에 오른 사람들
ⓒ2006 이승철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건축물들의 퇴락이 심하여 중창을 하지 않으면 무너질 위험에 처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승려들은 중창을 하려 하였지만 돈이 없어 걱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이 절로 찾아와 불사를 돕기 위하여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미모가 너무나 빼어나서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심산유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 중에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사람이 수덕각시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수덕각시는 이 불사가 잘 이루어지면 청혼을 받아드리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청년은 자신의 집에서 많은 재물을 보내어 3년 만에 불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 공덕주로 참석한 청년은 수덕각시에게 함께 떠날 것을 독촉하였다. 그러자 수덕각시는 더러워진 옷이나 갈아입을 시간을 달라 하고 옆방으로 들어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기척이 없는 것이었다.

 

▲ 정혜사 아래 길의 바위굴 통로
ⓒ2006 이승철
마음이 급한 청년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청년이 당황하여 여인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옆에 있던 커다란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이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그 후, 그때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만 되면 버선 모양의 버선 꽃이 피고 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 수덕을 따서 절 이름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겪고 본 당사자인 '정혜'라는 청년은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짓게 하고 바위 속으로 사라진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몰려들게 되었다고 한다.

수덕사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내려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전설을 들려주자 일행 중의 한 명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경내를 둘러본다.

 

▲ 수덕사 입구의 우편취급소와 태극기가 게양된 풍경
ⓒ2006 이승철

“그런데 저 탑 꼭대기의 황금이 정말 순금이 맞을까?”

그는 아무래도 그것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다.

“순금이면 어떻고 도금이면 뭘 해. 그냥 탑 위에 있는 건데…. 허허허”
“저게 어떻게 순금이겠어? 당연히 도금이지, 답답한 사람들하고는….”

어느새 기운 오후의 햇빛을 받아 그 탑의 황금빛 상륜부가 반짝이는 너머로 천년의 고풍스러운 대웅전은 고즈넉하기만 하였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 이승철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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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2006-03-03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