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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장국영의 도시' 홍콩

피나얀 2006. 3. 23. 00:05

 


그가 生을 놓았던 잿빛 공간… 세상은 벌써 그를 잊었다
그의 마지막 식사는 씨푸드수프와 등심스테이크.
그 식당의 스푼과 포크는 유달리 장식적이고 무거웠다.

 

홍콩을 여행하는 방법은 수십가지일 것이다. 얼마 전 개장한 디즈니랜드에 집중할 수도 있고, 유람선 투어를 할 수도 있으며, 쇼핑에 전력을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홍콩 배우 장국영의 자취를 되밟기로 했다.

 

다가오는 4월1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는 날. 애초 영화 ‘첨밀밀’을 테마로 삼으려 했지만, 홍콩 공항 서점에서 장국영 얼굴을 보는 순간 그 해 만우절에 거짓말 같은 비보를 들었을 때 충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미 떠난 그를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3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급경사의 트램을 타고 타이핑산(山) 정상의 빅토리아 피크로 갔다. 쌀쌀하고 흐린 봄날 오후 내려다보는 홍콩의 빌딩숲은 우울했다. 고층의 문명 뿐 아니라 바다도 하늘도 온통 잿빛이었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피크 타워의 ‘마담 투소 밀랍인형 박물관’은 휴관중이었다.

 

거기엔 ‘패왕별희’ 전통의상 차림의 장국영이 전시되어 있다고 들었기에 무척 안타까웠다. ‘패왕별희’는 그가 최고 연기를 보여준 작품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동성애자였던 장국영의 내밀한 속내가 담겨있는 영화였다. 어두운 실내의 유리관 속, 햇살이 비치면 녹아버릴 밀랍으로 남은 모습은 그의 삶 자체를 요약할지도 모른다.


 

해가 지자 빅토리아 피크에도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금지옥엽’의 촬영지였던 레스토랑 ‘카페 데코’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은 무척 화려했다. 넓은 실내에 들어찬 손님들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사실 장국영은 ‘금지옥엽’을 비롯해 꽤 많은 영화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다. 그러나 팬들이 아직껏 기억하는 것은 그리운 어머니를 뒤에 두고서도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이를 악문 채 뜰을 걸어나오던 뒷모습(아비정전)이거나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어가며 아내와 마지막 통화를 할 때의 떨리던 목소리(영웅본색 2),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허공을 응시하던 퀭한 눈빛(이도공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슬픔을 타고난다. 아무리 스포트라이트가 강해도 몸 속 깊숙이 허무와 고독을 숨긴 그들의 코트를 벗기진 못한다.


 

택시를 타고 장국영이 마지막까지 살던 집을 찾아 헤맸다. 운전사는 장국영에 대해 물어보자 “미쳤는지 갑자기 빌딩에서 뛰어내렸죠”라고 함부로 말했다. 그러곤 미안했던지 “어쨌든 참 특별한 사람”이라 덧붙였다. 그의 집은 카두리 애버뉴의 인적 드문 고급 주택가 그랜트 빌라 32A호였다. 5분만 내려오면 정신없는 홍콩에서도 시끄럽기로 유명한 몽콕의 재래시장이었다. 번잡하게 출렁대는 삶과 적막하게 고인 죽음이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깨를 겯고 있었다.


 

‘아비정전’ 촬영지를 찾아 센트럴 지역 주택가를 헤매다 800m 길이의 세계 최장 옥외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됐다. 20여개의 외줄 이동보도를 연결해놓은 ‘힐사이드 에스컬레이터’는 오전 10시20분을 기준으로 아침엔 내려가고 이후엔 올라가도록 운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엔 출근하기 위해 내려가는 사람이 더 많다고 운행 방향을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언덕을 오르는 이의 고통이 내려가는 사람 수고보다 훨씬 클 수 밖에 없는데, ‘고통의 양’이 ‘고통의 질’보다 중요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소수의 큰 고통을 덜어주는 게 다수의 작은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침사추이 지역 남쪽 바닷가 ‘스타의 거리’를 걸었다. 홍콩 영화인 73명의 이름과 손바닥 도장 동판을 깔아 놓은 그 거리에서 장국영 자리는 유덕화와 주윤발 사이였다. 그가 죽고난 뒤 1년이 지나 조성되었기에 그는 별과 함께 새긴 이름으로만 남아 있었다.

 

수많은 스타들이 박힌 보도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장국영 이름 곁을 무심히 지나쳤다. 일본 관광객을 몰고 온 가이드가 “이게 바로 3년 전 자살한 장국영입니다”라고 대단한 명소라도 되는 듯 외쳤지만 팔짱 낀 채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곧 심드렁하게 주윤발로 옮겨 갔다. 홍콩 도보 여행 안내책자에 스타의 거리는 ‘8분 소요’라고 적혀 있었다. 8분만에 훑어야 할 그

 


‘관광지’에서 장국영이란 이름은 그저 몇 초 시선만 주면 충분한 ‘볼거리’였다.

코즈웨이 베이 지역 ‘퓨전’은 그가 마지막 식사를 한 레스토랑이었다. 모던하고 우아한 장식의 이 고급 식당 웨이트리스에게 장국영이 최후에 먹은 음식이 뭐냐고 물은 뒤 주문했다. 시저스 샐러드와 씨푸드 수프를 곁들인 등심 스테이크. 레드 와인 소스로 맛을 낸 그 요리는 홍콩에서 경험한 최고의 맛이었다.

 

몇 시간 뒤의 죽음을 앞두고 단골 식당에서 즐기던 음식을 입에 넣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식당의 스푼과 포크 그리고 나이프는 유달리 장식적이고 무거웠다. 외부의 과도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장국영의 삶처럼.


 

이제 그곳에 가야 했다. 그가 24층에서 뛰어내렸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 들르지 않고 여정을 끝낼 순 없지 않은가. 홍콩 최대 번화가 센트럴의 마천루 한 축을 이룬 그 호텔은 영업을 중지한 채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건물 주위 둘러 쳐놓은 공사용 그물이 꼭 자살을 막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다.

 

건물 앞 분수대는 작동을 멈춘 채 맨바닥을 드러냈다.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는 며칠째 흐린 하늘에 젖어 음울하게 흔들렸다. 호텔 전면의 광장에서는 중년 여성들이 강사 지도에 따라 태극권 동작을 따라했다. 버스 정류장에선 귀가길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섰다.


 

빌어먹을. 3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세상은 마흔여섯에 허무한 생을 마쳤던 사내를 잊었다.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좁고 빽빽한 이 도시에서 날아오를 곳을 찾지 못했던 그는 결국 뛰어내렸다. 투신 후에도 그는 떠나지 못한 채 도시 곳곳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오래 전 이미 그를 떠나보냈다.

 

광장을 벗어나려다 시계를 보고 기어이 5분을 더 머무른 뒤에야 바다를 향해 걸음을 뗐다. 6시41분. 하루가 막 끝나려는 시간, 장국영이 이 번잡한 무대에서 퇴장한 시각이었다.

 

 

 


 

(홍콩=이동진기자 [ dj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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